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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정한 변호사
웨스트윙이라는 미국드라마가 있었다. 드라마는 미국 민주당 상원의원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된 주인공과 그를 보좌하는 참모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다. 여러 편의 이야기 중 가장 시의성(時宜性)이 있는 것은 바로 유엔사무총장에 관한 에피소드이다. 드라마는 2005년경에 방영을 시작해 2006년에 시즌 7을 끝으로 종영하였으므로 거기에 나오는 유엔사무총장은 아시아 아닌 다른 대륙 출신으로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통령은 유엔사무총장의 전화가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선뜻 그 전화를 받지 않으려고 한다. 전화의 안건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주차단속에 대한 항의였다. 대통령의 비서도 주차단속에 걸린 유엔 차량 문제 해결 민원 전화라는 것을 알기에 대통령에게 전화를 받으라고 재촉하지도 않는다. 드라마에서 이것이 그냥 일상적인 일로 묘사되고 있었다. 이 에피소드의 사실성 여부를 떠나 미국(또는 미 행정부)이 유엔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준 대목이라고 느꼈다.

이처럼 유엔사무총장이라는 승차권은 세계 어디에서나 유효하였을 것이다. 빅맨(Big Man)이었던 반기문은 할 수 있는 일이 참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시리아 국민이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정부군에 의하여 더 많이 죽어가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도, 난민들이 목숨을 걸고 지중해를 건너고 있는 문제에 대하여도, 이스라엘의 정착촌 건설 강행 및 팔레스타인 공습에 대하여도, 심지어 북한의 핵 문제에 대하여도 강대국들의 눈치만 보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역사상 가장 한 일이 없는 사무총장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금강산 관광 중단, 박근혜 정부의 개성공단 철수를 보면서도 그는 유엔사무총장으로서 어떠한 역할도 하지 않았다.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는 지위와 권한이 있었으면서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팩트 (Fact)다. 굴욕적인 한·일 정부 간 위안부협상에 대하여 그가 즉각 긍정적 평가를 한 것을 우리 국민은 잊지 않는다. 이제 와서 말을 교묘히 비틀 수는 있어도 내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는 없다. 귀국 일성이었던 ‘진보적 보수’와 같은 말장난은 기름 장어들의 전유물이다. 그는 또한 북한 핵 문제에 대한 결의안이나 북한 인권에 대한 결의문 등 수많은 유엔결의안을 통과시킨 장본인이면서 유엔사무총장의 정치 참여를 제한한 유엔결의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유엔 결의보다는 우리나라 선관위의 유권해석이 더 규범력이 높다는 것이 된다. 이를 애국주의라고 해야 하나? 그는 할 수 있었던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오로지 대과 없이 무탈하게 임기를 마치는 것에 집중하며 살았다. 공항철도 승차권을 사면서 만 원권 두 장을 한꺼번에 넣거나 양손을 모아 큰 하트를 만드는 방법을 잘 모르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그는 외교부 시절부터 유엔 총장에 이르기까지 온갖 의전(儀典)으로 둘러싸인 삶을 살았을 것이지만 국민은 그에게 꽃가마 태워줄 여유가 없다. 그는 자기 한 몸 불사르겠다고 하지만, 국민은 그가 그 한 몸 불사르지 말고 시골에 가서 그냥 잘 쉬었으면 한다. 이런저런 책을 쓰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다 세월이 5년 정도(선거법상 국내거주요건은 여기서도 큰 의미를 가진다) 흐르게 되면, 그제야 그도 만 원짜리는 한 번에 한 장씩만 넣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드라마처럼 주차 문제까지 해결해 주었을지 모를 유엔이나 미국이라는 공간적 경계, 10년이라는 유엔 총장 임기의 시간적 경계를 모두 지나버린 지금, 당신의 승차권은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 본 칼럼의 제목으로 로맹가리의 소설 제목 ‘이 경계를 지나면 당신의 승차권은 유효하지 않다’의 일부를 차용하였다. 프랑스 외교관이었으며 로맹가리이자 동시에 에밀아자르였던 그를 늘 존경하고 있다는 고백을 글 끄트머리에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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