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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원 컬처팩토리 대표
30년 전인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다 고문과 폭행으로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아직도 우리 귀에 생생한 장면이 있다. 당시 당국은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라는 궤변이자 왜곡발표를 했다.

정부의 거짓 발표로 인해 국민의 민주화 요구는 거세지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자, 5공 전두환 정권은 그해 4월 13일, 직선제 개헌 논의를 금지하는 조치를 단행하였다. 국민은 직선제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자는데 전두환 정권은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선제를 고수하겠다고 발표한 것이 4·13 호헌조치이다. 이에 국민의 분노는 현 촛불집회처럼 전국으로 일어났다. 당시의 구호는 명확하였다. ‘독재타도’, ‘호헌철폐’ 였다. 박종철고문치사사건과 4·13 호헌조치로 인해 국민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으며 6월 10일에는 전국에서 대규모 대정부투쟁 거리시위가 열렸다. 이 시위가 결국은 6·29선언으로 이어져 대통령직선제라는 중요한 민주주의 진전을 끌어냈다. 필자는 1987년 당시 극단 ‘처용’의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극단 ‘처용’도 도도한 민주주의 물결에 동참하고자 대구무대예술인 43인의 ‘호헌철폐’ 성명문건 작성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지금은 대한민국연극제로 명칭이 바뀌었지만, 당시에도 전국의 각 시·도에서 예선을 거쳐 본선격인 전국연극제라는 연극경연대회가 있었다. 극단 ‘처용’은 ‘저승훨훨건너가소’라는 연극작품으로 대구대표로 선발돼 전라북도 전주에서 개최되는 전국연극제에 참가가 예정돼 있었다. 전국연극제 개최도시인 전라북도 전주로 출발하기 하루 전 대구연극인 43인의 서명이 담긴 ‘호헌철폐’ 성명문건을 언론사에 넘겼다. 전주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 대구연극인 43인이 ‘호헌철폐’ 성명을 발표하였다는 기사가 언론에 실렸다. 정부 당국에서 즉각적인 조치가 내려졌음은 물론이다. 대구를 대표해서 참가한 극단 ‘처용’의 공연금지조치가 내려진 것이다. 당시는 5공화국의 서슬 퍼런 시절이고 강압 통치의 시절이었지만 단원들은 예술의 자유를 보장하라며 공연을 강행하겠다고 강한 의지를 당국에 전달했다. 결국, 당국에서는 극단 ‘처용’의 공연을 강제로 금지할 경우 후폭풍을 우려해서인지 공연은 우여곡절 끝에 무대에 올랐다. 작품은 관객의 뜨거운 호응을 끌어냈지만, 수상에는 제외됐다. 이미 시상식 전에 극단 ‘처용’은 수상에서 제외됐다는 이야기가 파다했고 그것이 사실로 나타난 것이었다. 그뿐이 아니고 1986년부터 극단 ‘처용’은 지금의 만경관극장 인근에서 ‘문화장터처용’소극장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당국에 의해 극장폐쇄조치의 보복을 당했다. 극장이 지하에 위치해 소방법에 저촉된다는 이유였다. 그동안 개관해 소극장을 운영해옴에 아무런 행정명령이나 조치가 없다가 4·13호헌조치철폐성명을 발표한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소극장들은 전국적으로 대개가 지하에 위치하고 있다. 임대료 문제도 있지만, 지하는 지상보다 소음의 방해를 받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전국연극제에서의 공연금지시도와 ‘문화장터처용’ 소극장 폐쇄조치는 지금부터 30년 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역사는 다른 형태로 반복되고 있다.

현 정부의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이 그것이다. 각종 제재를 가할 9천473명의 명단이 정부 주도로 작성되고 이 리스트에 이름이 올라가면 정부의 각종 지원에서 배제 대상이 되거나 제약을 가한 것이다. 연극, 영화, 미술, 음악, 문학 등 전 분야에 걸쳐 범위도 광범위하다. 현 정부와 정치 이념적 성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가장 자유롭게 예술을 통해 표현할 자유와 권리를 교묘히 억압하는 행태가 오늘 이 시대에 버젓이 자행되어 온 것이 다시 한 번 우리의 소름을 돋게 한다. 예술활동에 대해 정부가 가져 할 기본 덕목은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마라’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다시는 어두운 역사가 반복돼서는 안 될 것이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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