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27명의 국왕들 중에 성공한 국왕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 어렵게 즉위했다는 점이다. 성군의 반열에 오른 세종과 정조가 대표자들이다. 맏형인 왕세자 양녕을 제치고 셋째 아들이라는 불리한 상황을 극복, 즉위한 세종은 새 왕조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다”며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 벽파는 영조의 세손인 정조의 즉위를 한사코 반대했다. 숱한 암살의 위험을 모면하고 즉위한 정조는 미래지향적 개혁정치로 조선 후기 가장 성공한 개혁군주가 됐다.

하지만 어렵게 즉위했다고 모두 성공한 군주가 된 것은 아니다. 임진왜란 후 세자 광해군이 문안하면 “앞으로 문안하지 말라”는 선조의 꾸짖음에 광해군은 피를 토하는 고통을 감내했다. 이 같은 어려움을 뚫고 임금 자리에 오른 광해군은 외교에서는 탁월한 업적을 남겼지만 자신을 지지했던 소수당파 대북(大北)에만 의지해 정국을 운영하다 폭군으로 낙인찍혀 반정에 의해 쫓겨나 실패한 군주가 됐다.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가 영창군을 낳자 영의정 유영경 등이 소북이 돼 영창군을 지지해 위기에 빠졌을 때 정인홍 중심의 대북이 광해군을 지지, 어렵게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 임금의 자리에 오른 이상 군주는 특정 정파의 이해를 대변해서는 안 되는 원칙을 무시하고 광해군은 스스로 한 당파의 영수로 자임하면서 고립을 자초했다. 다른 모든 정파를 축출하고 대북의 일당독재를 구축하게 한 인목대비 폐모는 광해군의 종말을 재촉하는 치명타였다.

국왕에 대한 충성보다 부모에 대한 효도를 더 높이 평가하던 조선조에서 폐모는 패륜으로 몰릴 수 밖에 없었다. “철령 높은 제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 삼아 띄워다가/ 임계신 구중심처에 뿌려 본들 어떠리” 폐모를 반대, 북청으로 유배된 이항복의 시는 반정을 촉구하는 격문이 됐다.

친박에만 의존, 불통을 고집하다 최순실 사태까지 자초, 몰락한 박근혜 대통령의 일방통행 정치는 대북에만 기댄 광해군의 일방통행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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