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은 안 되고 나는 머리만 길러버렸다. 무릎이 찢어진 청바지는 굴을 만들지 못했다.* 발을 쑤셔 넣을 때마다 불감증에 걸린 질처럼 마른 사람들의 눈동자가 밟혔다. 벗어버린 허물을 다시 껴입듯 눈에 흙이 들어간 부모는 나의 길고 아름다운 머리를 보지 않으려 다시 무덤을 팠다. 나는 얼굴을 가면처럼 덮어쓴 채 꿈꾸는 척 잠꼬대를 했다. 아이들은 제 키보다 빨리 자라는 내 머리에 적응하느라 아침마다 차가운 물을 눈에 넣었다. 잘라라, 잘라라, 지저분하고 추잡스러운, 머리를, 그만, 잘라라, 는 말이 자라라 자랄라 자라잘로 들렸다.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머리만 길러버렸다. 아내는 프랑스 레즈비언과 하는 것 같다며 이국적인 혀를 귓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럴 때마다 머리칼이 어두운 목구멍으로 덩굴손을 뻗어 내 죄의식을 움켜쥐었다. 번들거리는 몸의 리듬, 검은 심장은 성냥불처럼 식어버릴 것이다.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머리만 길러버렸지만 밤마다 바람이 뱀의 형상으로 하늘을 나는 소리를 들었다.

*김수영의 「그 방을 생각하며」“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변용




감상) 수염을 기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까칠까칠한 턱을 내밀면 손등으로 내 수염을 쓰다듬어주는 다정한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수염이 제법 길어 무성해지면 수염만 길러서 뭐 할 거냐고 핀잔하기보다는 한 올 한 올 정성들여 다듬어주며 흐뭇이 바라봐주는 그런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시인 최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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