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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식 시인
심미학 혹은 미학은 자연이나 인생 및 예술 따위에 담긴 미의 본질과 구조를 해명하는 학문을 일컫는다. 소위 고상한 품격이나 운치에 관한 멋을 대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분야이다. 그러면 아스라이 추억만 남긴 채 일터를 떠나는 은퇴의 뒤태에도 미적인 감성이 있을까.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이형기 시인의 작품 ‘낙화’의 한 구절이다. 시인이 고백한 창작 과정을 보면, 청춘 시절의 곤궁을 소재로 이 시를 썼을 뿐 은퇴와는 관계가 없었다.

한데도 당시 퇴직자라는 미증유의 신천지로 진입하는 내게는 범상치 않은 이미지로 다가왔다. 은퇴자의 뒷맵시와 그 여정에 대해 고민하는 자극제가 되었고, 고만고만한 판박이 일상이 아니라 나만의 특별한 보람을 탐색했다.

작금 퇴직의 계절. 베이비부머의 이직은 절정이 아닐까 싶다. 몇몇 지인이 문자를 보냈다. 평생을 봉직한 소회를 피력한 문구. 내가 한우물 파듯이 밥벌이했던 은행도 해마다 수백 명이 퇴사한다. 거의 정년퇴직을 두세 해 남긴 희망퇴직. 명퇴금 명목으로 약간의 목돈이 주어지니 불만은 없었다.

뱅커의 급여는 여타 직종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축에 속한다. 모임에 나가면 이따금 은행원 고액 연봉이 화제로 회자된다. 그럴 땐 월급이 적으면 금융 사고가 일어난다고 대꾸했고, 그 협박(?)에 일견 수긍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이중톈 중국사 한무의 제국’ 편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 한나라 제도는 재산이 얼마 이하이면 관리가 될 수 없었다. 이는 부자로서 관리에 오르면 횡령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도로 만들었다고 한다. 물론 나중엔 돈만 있으면 관리가 되는 것으로 변질돼 버렸지만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실소가 터졌다. 황제의 오만과 나의 논리가 서로 엇비슷해서 황당했기 때문이다.

오로지 가족을 부양코자 앞만 보고 달려온 사람들이 맞이한 인생의 터닝포인터. 다들 유사한 여로를 걸어왔다. 학업을 마치고 직장을 다니며 결혼을 하고서 자식을 키웠고, 마침내 마주한 새로운 선택지였다. 아등바등 살아온 금전의 질곡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하는 시간의 축복을 받았다.

언젠가 취업 포털 잡코리아가 설문 조사한 결과, 직장인 65%는 취미가 없다고 응답했다. 여유가 없고 먹고살기 바쁜 데다 피곤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취향이 없거나 취미를 못 찾은 은퇴자도 부지기수라 여긴다. 취미는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 하루아침에 뚝딱 생겨나진 않는다.

65세를 노인 기준으로 삼은 것은 1950년대 중반이다. 요즘 나이는 건강 상태를 고려할 때 0.7을 곱해야 타당하다고 말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또 다른 표현이다. 팔순이 넘은 엄마께 가끔 하는 우스개가 있다. ‘0.7을 곱하면 엄마는 오십대예요. 힘내세요.’ 그러면 기분이 좋으신지 빙긋이 웃으신다.

거개의 퇴직자는 예순을 넘보는 나이다. 암컷을 유혹하던 화려한 깃털이 빠진 공작처럼, 반들거리는 이마의 평수가 넓어지고 머리숱이 듬성듬성해지는 중년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고 했던가. 입시생이 진로를 고민하듯이 은퇴자의 방향을 모색하자. 내가 정말로 원하는 뭔가에 도전할 천재일우의 시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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