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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AI가 포유류인 고양이에게도 전염되었다고 합니다. 그 많은 닭과 오리를 살처분하는 것도 결국은 포유류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는데 방역행정에 큰 구멍이 뚫린 느낌입니다. 이 일에 고양이가 연루된 것이 좀 안쓰럽기도 합니다. 지금 이 땅에서 고양이가 점유하고 있는 불안한 위상 때문입니다. 길고양이들이 늘어나면서 고양이에 대한 호오(好惡)가 사회적 갈등으로 분출되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보호해야 할 생명이라는 쪽과 가급적 박멸해야 하는 오염된 환경 인자라는 쪽으로 선명하게 나뉩니다.

문제는 고양이에 대한 취향이 ‘타고나는 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설명과 이해’가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타고나는 것들은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얼마 전에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잔인한 ‘고양이 대학살’이 이루어졌다 해서 항간의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길고양이 집합소로 사용되던 아파트 지하공간을 마치 아우슈비츠처럼 집단살해의 공간으로 사용했던 모양입니다. 그곳 주민들 사이에서는 물론이고 전국적으로도 그 잔인한 처사에 대해서 비난의 여론이 들끓었습니다. 

불편, 불결을 이유로 우리 인간을 의지하고 사는 동거 동물의 생명을 그렇게 무참하게 뺏을 수가 있는가라는 원망이 쏟아졌습니다. 그 뒤에 또 고양이 밥을 주던 아주머니 한 분이 아파트 옥상에서 아이들이 장난으로 던진 벽돌에 맞아 목숨을 잃는 비극도 생겼습니다. 무엇이 이런 비극을 초래하는 걸까요? 고양이 쪽에서 한 번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참고로 저는 집에서 고양이를 키운 적이 있고, 그 경험을 토대로 <고양이 키우기>라는 중편소설을 쓴 적이 있는 사람입니다.

고양이 취향은 시기별로, 나라별로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고양이들이 그리 나쁜 대접을 받지 않았습니다. 애칭도 많았습니다. ‘나비’나 ‘살찐이’ 등으로 불렸습니다. 귀 모양이 나비 같아서, 혹은 나무를 잘 타서 ‘나비’라고 불렀다는 말도 있습니다. ‘살찐이’는 ‘살살 걷는다’에서 나왔다는데 물론 민간어원입니다. 이웃 나라 일본은 고양이에 대해서 우리보다는 훨씬 더 너그러운 편입니다. 

재물을 부른다는, 한쪽 손을 들고 있는 고양이 인형은 가게마다 하나씩은 다 있습니다. 고적지(古蹟地)에 가보면 관광객들의 손을 거리낌 없이 받아내는 살찐 고양이들을 자주 봅니다. 그 정도까지 우리네 고양이들이 신분상승 되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대로의 삶의 방식이 있는 거니까요. 다만, 염려되는 것은 현재 AI 상황이 이 땅의 고양이들에게 애꿎은 희생을 강요하는 계기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일입니다. 특히 사회적 분노의 표출이 ‘고양이 대학살’이라는 통로를 찾지 않기를 바랍니다. 파괴를 요구하는 약자의 분노는 종종 엉뚱한 통로를 찾는 습성이 있습니다. 정작 진짜 목표는 우회하면서요. 옛날 프랑스에서 있었다는 ‘고양이 대학살’이 한 참조가 됩니다. 

“그러한 점들을 감안한다면 고양이 학살이 노동자들에게 재미있었던 이유는 명백했다. 즉 그것은 그들이 ‘부르주아’에게 반격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중략- 다음으로는 그 학살을 일종의 ‘상징적 재판’으로 간주해 ‘부르조아’를 단죄하였다. 그들은 또한 그것을 마녀 사냥으로도 이용하였다. 여주인이 가장 아끼던 고양이를 죽일 구실을 만들고 그것을 실행함으로써 그녀를 마녀 혹은 탕녀로 만들었다.”(로버트 단턴, 조한욱역, ‘고양이대학살’ 중에서) 


<고양이를 부탁해>(정재은, 2001)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대학생도, 재수생도 아닌 스무 살 우리 딸들의 이야기입니다. 그 영화에 어린 새끼 고양이가 한 마리 나옵니다. 다섯 명의 친구들이 그 고양이 양육 때문에 고민하는 모습이 짠하게 다가옵니다. 결국, 우리 모두 누군가의 ‘양육’ 덕분에 살아온 생명입니다. 고양이를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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