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장 너머 시끄러운 세상에 뜻 두지 말고 귀 먹은듯 살리

▲ 심수정은 양동마을의 안산인 성주봉 자락에 있다.

양동마을 입구에서 검표소를 지나면 왼쪽으로 물봉동산 아래 있는 관가정과 향단이 보이는데 관가정과 향단을 그냥 두고 안계댐으로 가는 마을 안길을 따라간다. 이향정과 양동마을체험관과 강학당이 있는 하촌을 지나면 네거리가 나오는데 왼쪽으로 꺾으면 물봉골가는 길이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샛길 언덕에 심수정이 나온다. 풍수상 ‘물 勿’자형인 양동마을의 마지막 획에 자리 잡았다. 

심수정은 농재 이언괄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정자다.

심수정은 농재(聾齋) 이언괄(李彦适·1494~1553)을 추모해 1560년께 여강이씨 후손들이 지은 정자다. 맞은편 물봉동산 아래 향단이 이언괄의 집이므로 향단에 딸린 정자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이번이며, 어머니는 경주손씨 손소의 딸, 3살 위의 형이 이언적이다. 이언괄의 호 농재는 시끄러운 세상에 뜻을 두지 말고 귀먹은 듯 살아가겠다는 뜻으로 지었다. 형 이언적에게 공부를 배웠고 성리학과 경전에 밝아 후진 교육에 힘을 쏟았다. 1547년(명종2) 송라도 찰방으로 있을 때 주민들의 부역을 경감하고 세금을 공정하게 징수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형 이언적이 윤원형 일파에 몰려 북청에 유배되자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윤원형의 전횡을 규탄하기도 했다.
심수정 뒤 성주봉 산자락에서 본 물봉.

심수정은 양동마을의 안산인 성주봉 아래 자리 잡고 있다. 성주봉의 가파른 산자락을 절개해 뒷담을 삼고 서쪽으로 향해 있다. 심수정에서 보면 정면에서 오른쪽 언덕에 있는 관가정과 향단이 눈에 들어온다. 시야에 들어오지는 않지만 물봉동산 너머 멀리 설창산이 우뚝 서 있다. 양동마을은 설창산을 진산으로 하여 남동쪽에 안산이 성주봉이 자리 잡고 있는 반면 심수정은 성주봉 자락에 자리 잡아 성주봉을 진산으로, 설창산을 안산으로 두고 있는 셈이다.

독특한 좌향만큼이나 건축물도 독특하다. 심수정은 정자와 행랑채로 돼 있는데 두 건물동이 모두 ‘ㄱ’자형으로 건축됐다. ‘ㄱ‘자인 두 건물의 블록을 잘 맞추면 비로소 ‘ㅁ’자형이 된다. 정자건물과 행랑채 사이를 벌여 공간을 넓게 활용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정자는 일각문을 세우고 행랑채와의 사이에 담장을 뒀다. 일곱 간 대청에 북동쪽과 북서쪽에 각각 온돌방을 뒀으며 북서쪽 끝에 누마루를 조성했다. 팔작지붕으로 지었다. 철종때 화재로 전소됐다가 1917년께 본래의 모습대로 복원했다.

정자 안에는 두 개의 심수정 편액을 뒀다. 행서체로 쓴 편액은 추녀 아래에 있고, 예서체로 쓴 편액은 대청마루 뒤편 바라지 창틀에 걸렸다. 정자 이름은 ‘심여지수 心如止水’에서 따왔다. 물이 머무는 곳은 가장 낮은 곳인데 거기서 비로소 고요해진다. 마음을 늘 낮은 곳에 두리라.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노자의 ‘상선약수’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북동쪽 방은 이양재(二養齋)다. ‘음식을 절제하며 몸을 기르고 말을 삼가 덕을 기르라’는 뜻이다.
심수정의 누마루인 함허루에서 본 향단.

이양재에서 문을 열어젖히면 눈길은 함허루 마루를 지나 물봉동산 아래 향단에 머문다. 향단은 이언괄의 집이다. 회재 이언적이 경상감사로 재직할 당시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동생 이언괄을 위해 지어준 집이다. 이언괄은 여강이씨 향단파의 파조이기도 하다. ‘후손들이여 심수정에 머무는 동안 만이라고 근본이 어디에 있는지 똑똑히 알고 있으라.’
심수정 현판.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 거기서 멈추고 비로소 고요함이 생긴다.

북동쪽 방과 연결된 마루는 ‘삼관헌 三觀軒’이다. ‘세 가지를 보면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어진 사람은 그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고, 지혜로운 사람은 그 일 처리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고, 굳센 사람은 그 뜻을 보면 알 수 있다’는 데서 빌려왔다. 이 말을 형상화한 것이 심수정 담벽을 둘러싸고 있는 세그루 회화나무다. 북서쪽 끝에 있는 ‘함허루 涵虛樓’는 ‘논어’ ‘태백’에서 증자가 안회의 겸손함을 칭송하여 한 말이다. ‘함涵’은 ‘젖다’ 또는 ‘머금다’는 뜻이다. ‘허虛’는 불교의 ‘공’ 도교의 ‘무’와 비슷한 말이다. ‘비어 있거나 없는 것을 머금고 있다’는 뜻은 결국 ‘텅 비어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꽉 차 있다’는 의미이다.

정자의 기단은 커다란 장방형 강돌을 한 줄로 깔고 그 위에 길고 넓은 석재를 놓아 갑석으로 사용했다. 기단 앞에는 두 개의 섬돌을 두었는데 둥글 넓적한 강돌을 두어 자연스러움을 강조했다. 기단으로 올라가는 북쪽 섬돌 좌우에는 밤에 관솔불을 밝히는 정료대를 두었다. 심수정에서 정자 기능을 맡고 있는 ‘함허루’는 나비모양의 계자난관과 팔각불발기창이 특징이다. 벽으로 사용하다 사람이 모이면 문을 열어젖혀 넓은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정자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담장 앞에 시립하고 있는 세 그루 회화나무와 정자 앞마당의 향나무다. 수령 250년이 된 회화나무는 담장 안에서 자라는데 그중 한 그루는 담장을 뚫고 밖으로 뻗어 있다. 심수정은 1560년에 세웠으나 철종 때 화재로 소실되어 1917년에 다시 지은 건물로, 중건 당시 기존에 있던 회화나무를 손상시키지 않고 집을 지어 나무와 건물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심수정 앞마당에 서 있는 굽은 향나무.

선비에게 회화나무는 어떤 의미일까. 회화나무는 본래 중국 주나라에서 선비의 무덤에 심던 나무였다. 회화나무를 학자수라 부르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중국 주나라에서는 천자의 고문 역할을 하는 삼공(태사와 태부, 태보)을 삼괴(三槐)라고 불렀는데 ‘괴 槐’가 바로 회화나무를 말한다. 삼공이 주나라 외조에 심은 회화나무를 향해 앉았기 때문이다. 경주시 강동면 다산리에 있는 삼괴정은 이방린 이유린 이광린 형제를 추모하는 정자다. 이들 형제는 모두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다. 중국에서는 음력 7월께 회화나무가 꽃을 피우면 진사시험을 쳤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과거시험을 치르러 가거나 합격하면 회화나무를 심곤했다. 심수정의 회화나무도 후손들이 입신양명을, 대학자가 배출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반영할 것이 아닐까.

정자 앞마당에는 두 그루의 향나무가 있는데 하나가 용이 꿈틀거리듯 휘어져 자라고 있고 온돌방 앞의 향나무는 곧게 위로 뻗어있다.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을 볼 때의 감동이 밀려온다. 곡선과 직선, 강렬함과 부드러움. 이질적 것의 조화가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향나무는 선비의 향기다. 향이 부정을 없애고 정화시킨다고 생각했다. 잡귀 잡신을 내쫓는 벽사의 힘이 있는 나무다. 향을 피우면 그 향을 맡고 신이 찾아오는 것이다. 신에 대한 맹세이기도 하다. 불교의 ‘향화정’은 부처님 앞에 향을 피우고 맹세하는 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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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완 자유기고가
양동마을의 서백당은 우재 손중돈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지만 손중돈의 외조카 회재 이언적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혈식군자(나라의 제사를 받을 만큼 높은 업적을 이루는 사람)’이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는데 손중돈과 이언적 두 사람이 그 사례이다. 서백당에는 560년된 향나무가 있는데 그 향나무의 기운이 이들을 배출했다고 한다. 향단에도 오래된 향나무가 수호신처럼 지키고 서 있고, 이언적이 어릴 때 외삼촌 손중돈과 함께 생활했던 관가정의 향나무도 아름답고 신비스런 모습으로 오랜 세월 산 아래 양동마을을 지나는 안락천을 지켜보고 있다. 이언적이 한때 삭탈관직 당해 고향에 내려왔을 때 머물던 독락당에도 500년된 향나무가 있다. 집안에 심어진 향나무는 양동마을 이씨와 손씨 집안의 전통이며 선비의 향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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