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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정체성을 말한다] 19.근대 일본의 침략에 최초 항쟁

용맹한 경북 동학농민군, 최전선에서 일본군과 맞서다

김정모 기자 kjm@kyongbuk.com 등록일 2017년02월02일 20시00분  
석문 전투지.

19세기 후반 동아시아 국가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청국이 1840년과 1856년 두 차례 벌어진 아편전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이었다. 청국은 막대한 배상금을 물면서 10개의 항구를 개방했고, 자유 무역과 기독교 포교를 허용했다. 이제 서구 세력의 침투는 막을 수 없게 되었다. 

청국의 지식인들은 ‘해국도지’ 등 서양 소개서를 펴내서 그 사실을 알렸고, 정부는 신기술을 수용하는 양무운동을 시작했다. 그 최대 성과가 뤼순과 웨이하이의 요새화와 철갑군함을 구입해서 막강한 함대를 구축한 것이다. 

북양함대를 보유한 청국이 군사력을 과시할 나라는 조선뿐이었다. 인천에 수시로 함대를 보냈고, 원세개는 그 위력에 기대서 온갖 간섭을 자행했다. 청국에 대한 조선인의 반감이 유례 없이 높아졌다. 

일본에서는 메이지유신으로 국가를 일신시켰다. 조슈와 사쓰마번의 사무라이들이 쿠데타로 도쿠가와막부를 무너뜨린 후 정치체제를 바꾸고 육군과 해군 등 신식 군대를 양성했다. 부국강병을 추구한 것이다. 그러나 강국이 되는 수단과 목적이 해외침략이었고, 그 첫 목표가 조선이었다. 조선침략은 조슈와 사쓰마 군벌의 오랜 꿈이기도 했다.

일본은 정보장교를 조선에 보내서 내정은 물론 군사력 등을 정탐해갔다. 조선 내부의 모든 기밀은 상세히 파악되었다. 1876년 조선을 정탐하고 돌아간 한 스파이는 일본군 2개중대만 보내면 조선을 정복할 수 있다고 했다. 군사력의 격차가 그만큼 심각했다.

세계사의 흐름을 직시하지 못한 조선은 19세기 후반까지 지배층은 구체제 유지에 급급했다. 정치 문란과 신분제 폐단, 그리고 자연재해로 백성들의 삶이 갈수록 어려워져도 개선될 전망은 보이지 않았다. 동아시아 정세를 파악해서 대처하는 역량은 물론 국정을 개혁해나갈 정치력도 갖지 못했다.

경상도에서 창도된 동학은 한국근대사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동학 교리는 구체제를 타파하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사회의 특징은 정치적 자유, 사회적 평등, 경제적 자본주의, 사상적 다양성이 특징인데, 동학은 신분제 부정뿐 아니라 사회적 평등을 직접 실천하였다. 또한 동아시아의 최대 과제가 된 외세 침략을 막아내는 문제가 교리의 바탕이 되고 있다.

1894년은 커다란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다. 동학농민군의 봉기, 일본군의 경복궁 기습점령과 경군 무장해제, 청일전쟁, 친일개화파가 주도한 갑오개혁 등이다. 어떤 사건도 전례 드문 대사건이었고, 전국이 격동하였다.

먼저 동학농민군이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봉기했지만 경상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전임 감사 이용직과 여러 지방관의 가렴주구와 공금 포탈이 농민 불만의 원인이었다. 김해를 비롯 여러 지역에서 농민항쟁이 치열하게 일어나자 정부는 조사관을 파견해서 수습하도록 했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기습한 사건이 경상도에 전해졌다. 국왕과 왕비를 인질로 내정 간섭을 자행한다는 소식과 함께 일본군이 나타났다. 청일 양국의 선전포고 후 조선에 증파한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해서 대구를 거쳐 북상하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임진왜란의 혹독한 피해상이 전승되면서 반일 의병의 전통을 기려온 경상도에서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경상감사는 정부 지시에 따라 일본군에게 협력해야 했다. 대구에 들어온 일본군은 히로시마의 제5사단 연대병력과 지원부대였다. 일본의 재침을 막는 것이 가장 큰 임무였던 대구의 친군 남영과 진주 병영, 그리고 통영의 수군통제영은 자체 무력만으로 일본군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일본군은 부산부터 문경까지 일정한 거리마다 병참부와 군용전신소를 설치하고, 군용막사와 창고까지 짓고 군대가 머물렀다.

경북에서 일본군 축출을 위해 나선 세력은 동학농민군이었다. 동학 조직은 농민들을 규합하여 세력을 키우고 무기와 군량을 모으면서 훈련을 했다. 일본군이 세운 군용전선도 전신주나 전신선을 잘라서 단절시켰다. 평양전투를 전후한 긴장된 시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여러 군현에서 양반과 향리들과 충돌하기에 이르렀다. 동학 세상이 되자 떼를 지어 수탈을 자행하던 관리를 징치하고 불량 양반에게 보복해서 과거의 원한을 풀려고 했던 것이다. 노비들은 스스로 해방시켜서 주인집을 나와 동학에 들어갔고, 반상의 차별이 없는 사회를 만들려고 했다. 유생들은 추로지향을 자처하는 경상도에서 상천민이 동학에 들어가서 행패를 부리는 것이나 신분제 부정행위를 용납할 수 없었다.

예천 한천제방과 서장자들.

예천에서 양반 향리들이 민보군을 결성해서 동학농민군을 견제했다. 일본군 병참부에서도 정찰병을 파견해서 상황을 살피도록 했는데 태봉병참부의 다케노우치 대위가 산양의 동학농민군 집결지에서 노출되어 죽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8월 말 예천전투와 석문전투가 벌어졌다. 예천전투는 읍내 민보군이 방어전을 벌인 것이었고, 석문전투는 예천의 동학 근거지인 소야 어귀에서 일본군이 공격해서 벌어진 전투였다.

상주동학기념비.
9월 18일 동학교단에서 기포령을 내리자 즉시 상주와 선산 읍성이 점령되고, 이를 일본군 병참부 주둔병이 기습해서 되찾는 사태가 벌어졌다. 성주와 김천 등지도 동학농민군이 읍내와관아를 점거해도 스스로 막아낼 수 없었다. 결국 대구에서 남영병이 잇달아 출동하고, 일본군이 순회해서 동학농민군을 해산시킬 수 있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경북의 사태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유일하게 전세에 영향을 미친 외부 사건이 바로 병참망과 전신망을 단절시킨 동학농민군의 공세였다. 중국학계에서도 그 중요성을 지적하고 있다. 일본이 근대식 동원사단으로 조선을 침략했을 때 동학농민군은 관군이 아닌 민군으로서 처음 일본군에 항쟁하였다. 갑오년에 그 첫 전투와 성과를 낸 곳이 경북이었다.

동학농민군의 재봉기는 거의 전국에 걸쳐서 전개되었다. 일본군은 친일파 대신에게 최대의 반일세력인 동학농민군의 진압을 요청하도록 강요했다. 그리하여 증파된 일본군은 지휘권을 장악하여 경군 각 부대까지 이끌고 전국을 순회하면서 동학농민군을 학살했다.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곳이 공주 우금치였다. 충청도 강원도 전라도 황해도 그리고 경상도 여러 지역에서 일본군에게 살해된 사람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이다.

▲ 신영우 충북대 사학과 교수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만을 식민지로 지배하면서 청국에서 받아낸 막대한 배상금으로 10년 간 군사력을 키웠다. 이 군사력을 구사해서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조선의 국권을 탈취했다. 1910년부터 보면 36년, 통감부 설치부터는 40년, 1894년 경복궁 기습부터 헤아리면 일본의 지배를 받은 기간이 50년이다.

19세기 후반 세계사의 전개에 어둡고, 더구나 아편전쟁에서 교훈을 배우지 못한 결과는 매우 참담했다. 반세기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정상적인 발전과정을 밟아야 할 역사의 흐름도 왜곡되었다. 그 책임은 1차로는 당시의 집권세력, 2차로는 지식인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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