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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정한 변호사
삼례 나라슈퍼 강도치사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복역을 마친 피고인들이 형사소송법 제420조 제1호, 제5호, 제7호의 사유를 들어 재심을 신청하였을 때에, 법원은 위 사유 중 제5호(유죄의 선고를 받은 자에 대하여 무죄를 인정할 명백한 증거가 새로 발견된 때)에서 정한 재심사유가 있으므로 다른 재심청구사유에 관해 더 나아가 살펴볼 필요 없이 재심을 개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른 재심 재판에서는 무죄가 선고, 확정되었다.

민사 소송의 판결문에도 ‘더 나아가 살펴볼 필요 없이’ 문구는 자주 사용된다. 변론종결까지의 주장과 증거만으로도 이미 재판의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상황에서는 신속한 판단을 위하여 굳이 그 재판에서 제기된 쟁점 모두를 판단하는 수고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는 사법제도가 문제(분쟁) 해결의 툴이지 학문연구를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상황에서도 재판 절차가 지연되는 것은 결코 정의롭지 못하다는 공감의 확인이다.

헌법재판소는 이번 주 초, 국정 공백 사태의 장기화에도 불구하고 노골적으로 탄핵심판 시간 끌기 작전을 벌이고 있는 피소추인대리인단의 증인 신청에 대하여 또다시 일부 채택하는 결정을 하였다. 헌법재판소의 이런 결정은 매우 우려스럽다. 만약, 헌법재판소가 국회가 헌법재판소에 제기한 탄핵사유 중 어느 것에 대하여도 지금까지의 심판과정의 결과에 따라 탄핵을 인용할 만한 증거가 없어서 추가로 이번에 다시 증인신문을 받아 준 것이라면 이것은 탄핵 인용을 바라는 국민의 의사에 정면으로 반하는 심판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 경우 헌법재판소는 머지않아 개헌을 통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운명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재판관들의 이름도 영원히 박제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결론은 상상조차 하지 않고 싶다. 대다수 국민은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심판이 결국 인용될 것을 믿는다. 그런데 탄핵 인용을 위한 충분한 증거가 제출되었고 이미 제출된 증거에 의하더라도 피소추인을 탄핵하여야 할 사유가 있음에도 헌법재판소가 피소추인대리인단의 증거신청을 ‘방어권 보장’ 차원에서 받아 준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 역시 매우 실망스럽다. 일반 형사재판에서의 방어권 보장이라는 형용(形容)은 이번 탄핵 심판 사건에서의 국가적 재난 상황 - 국가원수 및 행정부 수반의 직무대리 상황이 2개월째 계속되고 있는 - 에 비추어 보면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수사(修辭)일 뿐이다.

헌법재판소 통합진보당 해산사건에서의 법정 의견에 대한 보충의견(이 역시 통진당 해산 의견이었다) 중 일부를 인용해 본다. “‘아주 작은 싹을 보고도 사태의 흐름을 알고 사태의 실마리를 보고 그 결과를 알아야 한다 (見微以知萌 見端以知末)’는 것이 옛 성현들의 가르침이다. 따라서 우리의 미래와 생존에 관한 판단에는 무엇보다 선입견이나 편견을 배제한 통찰이 필요하다. 민주주의는 자유로운 의견과 비판, 모든 사상과 문화를 허용하고 보장하며, 또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인류가 발전시켜온 민주주의의 최고의 장점이고 가치이기도 하다”

피소추인대리인단은 형사소송법이 준용됨을 들어 피소추인의 방어권 보장을 주장하고 있으나, 피소추인인 대통령은 기자간담회나 인터넷 개인방송을 통하여 탄핵심판 사유에 대하여 전면부인으로 일관하면서도 법원 영장에 의한 청와대 압수수색을 거부하고, 대면조사도 비공개조건을 내걸며 거부할 듯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어느 형사 피고인이 이런 권리를 가질 수 있는가? 대다수의 국민은 헌법재판소가 하루라도 빨리 ‘더 나아가 살펴볼 필요 없이’ 탄핵 심판을 인용하기를 바라고 있다. 더 늦으면 진짜 늦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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