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곡진 인생 끝자락에서 마침내 발견한 마음의 안식처

▲ 덕봉정사 전경. 소나무와 배롱나무, 대나무 시원한 연못이 어울러져 경승을 이루고 있다.

덕봉 이진택(李鎭宅·1738~1805)은 낭만가객이었고 풍운아였다. 소신 있는 행정가였고 세상을 바꾸는 개혁가이기도 했다. 정조 재위 시절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 성균관 전적 예조정랑 사헌부 지평을 거쳐 사헌부 장령을 지냈다. 젊은 시절 과거에 낙방하자 금강산을 다녀와 ‘금강산유록’을 남겨 이름을 얻었다. 정조의 신임을 얻어 백련을 선물 받았다. 왕궁이 있는 세심대에서 왕과 함께 시를 주고 받을 정도로 시문도 뛰어났지만 정조가 죽은 뒤 65세의 나이에 조선의 극악지인 함경도 ‘삼수’에 귀양을 가는 굴곡진 생을 살았다. 귀양을 가는 와중에도 관동팔경을 돌아보며 시를 남기는 낭만적인 인물이었으며 시노비 폐지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농무책자오조’를 실시하도록 하는 개혁가였다.

덕봉정사는 덕봉 이진택의 호를 따 지은 정자로 이진택이 말년에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다.

이진택이 말년에 초당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 덕봉정사다. 본래는 초당이었으나 이진택 사후 증손인 이우영이 110년 전쯤에 확장하고 중창했다. 경주시 마동(馬洞)에 있다. 마동은 마을이 말 모양을 닮았다는 데서 유래됐다는 설과 조선시대 마동 인근에 방어리역 등이 있었는데 역참에 소용되는 말을 먹이는 마을이라는 데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 불국사역이 있는 구정동에서 불국사 쪽으로 가다 보면 경주문화재연구소가 나오고 조금 지나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길로 들어서면 오래된 소나무 숲이 보인다. 소나무 숲에서 왼쪽으로 접어들면 왼쪽에 규모가 큰 무덤이 나온다. 덕봉 이진택의 무덤이다. 무덤 앞에 펼쳐지는 큰 연못과 연못 넘어 보이는 고색창연한 정자가 덕봉정사다.

덕봉정사 안에서 바로본 연못과 외경

정자는 ‘ㄴ’자 형태다. 방이 두 칸인데 서쪽 방은 덕봉의 호를 따 ‘덕봉헌’ 동쪽 방은 ‘경모재’이다. 방과 방 사이에 대청마루가 있고 ‘경모재’ 앞에는 누마루를 내 ‘ㄴ’자 형태의 건축물을 완성했다. 정자 내부는 독특하다. 폐사찰 건축자재를 활용했다는데 양쪽 방문 문틀 위에 여의주를 입에 문 용 목각을 배치했다. 엄중한 분위기에 압도된다. 정자 앞 연못에는 시든 연꽃대가 물속에 잠겨 있고 헐벗은 배롱나무가 서 있다. 만물은 제철이 지나면 시들하다. 정자 옆에는 대나무 숲이 울창하고 키 큰 소나무가 시립하고 있어 마을 속에 있는데도 경승지 풍광을 갖추고 있다. 여름에는 경관이 더 뛰어날 것이다.

덕봉정사 동쪽방인 경모재의 팔각 불발기창

정자 주인 이진택은 정조의 정치적 동지였다. 정조의 탕평책을 후원하고 실행했다. 남인들이 주장하는 사도세자 신원문제와 노론이 요구하는 시노비폐지를 공평하게 처리했다. 사도세자 신원문제를 제기한 영남사림이 만인소를 들고 올라오자 영남 출신의 관리들을 규합하여 상소를 올렸고 정조의 비답이 시원치 않자 자신이 홀로 상소를 올렸다. 뜻이 관철되지 않자 벼슬을 던지고 낙향했다. 시노비폐지는 개혁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사례다. 그는 시노속안을 폐지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사대직겸진시노혁파소’를 올려 관철시킴으로써 조선 땅에서 관청의 공노비를 없앴다. 그는 꼿꼿한 선비이기도 했다. 개성 경력으로 근무할 당시다. 청나라 칙사가 황제의 부음을 전하러 왔다. 칙사가 가는 곳마다 술과 음악이 넘쳐났다. 이진택은 향연을 베풀지 않았다. 칙사가 따졌다. ‘황제가 죽으면 모든 음악을 금지해야 하는데 칙사에게 술과 음악을 베푸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라고 답해 칙사를 꼼짝 못 하게 만들었다. 이 말을 들은 정조가 ‘본디 그 사람의 어짐을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큰일을 했다’고 기뻐했다.
정조가 그를 얼마나 신임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세심대에서 열린 시회다. 정조 15년(1791년) 3월 정조와 영의정 이복원 좌의정 체제공 이조판서 홍양호 등이 꽃놀이를 하면서 차례로 시를 읊었다. 그 자리에는 이진택도 참석해 지를 지었다.

성가는 봄에 이르렀고
하늘의 봄은 평화롭게 지껄이는데
온 세상은 봄으로 화하였고
명원에는 수목이 우거졌네
남산은 먼 땅 끝에 붙어 있고
북악의 봉우리는 하늘만큼 높은데
세심대 아래 맑은 물 길러다가
술잔에 가득 채워 이 마음 씻으리라

덕봉의 묘소. 덕봉정사 들어가는 입구에 있다.

좋은 시절은 흐르는 물처럼 쉬이 간다. 이진택이 벼슬살이를 끝내고 고향 경주로 돌아온 때는 그의 나이 63세. 그해에 정조가 죽었다. 고향에서의 편안한 노후를 생각했던 이진택에게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왔으나 봄 같지 않은 시절이었다. 정조가 죽자 1801년 신유박해가 시작됐고 정국은 살벌하게 돌아갔다. 고향 경주로 내려와 덕봉정사에 머물고 있던 덕봉 이진택에게도 심상치 않은 소식이 들려왔다. 이진택과 함께 현직에서 근무했거나 뜻을 같이한 이들이 서학 무리로 몰려 귀양을 가거나 죽었다. 해가 바뀌자 사간원 헌납 강세륜이 이진택을 지목해 탄핵했다. ‘서유방을 두둔하며 이가환에게 빌붙었으며 정약용과 친하게 지냈다’는 이유로 변방 귀양을 요구했다. 그는 사헌부 시절 정약용과 2년을 함께 근무했고 그 후 수많은 서신을 주고받으며 교류를 이어갔다. 그 당시 정약용과 주고받았던 서찰과 문건은 불에 타 없어지고 일부는 동국대에 기증한 소정문고에 보관 되고 있다.
1802년 음력 2월 10일. 산수유 목련에 이어 진달래, 개나리 등 붉거나 노란 꽃이거나 백화가 제방하는 봄에 이진택은 계절을 거꾸로 거슬러 자기 인생의 가장 혹독한 겨울 ‘세한’의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65세였다. 천 리 먼 길, 함경도 ‘삼수’ 유배가 떨어졌던 것이다.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할 말은 해야겠다’라거나 ‘삼수갑산을 가서 산전을 일궈 먹더라도’라고 하는 그 ‘삼수’다. 사람들은 죽을 때 죽더라도, 어떠한 위험과 고난을 감수하고서라도 결기를 드러내야 할 때를 그렇게 말한다."변새에 오랑캐 연기 적적하고 오랑캐의 산에도 한나라 해가 밝구나"(이계손의 시)라고 할 정도로 험악하고 위험한 지역이다. 중죄인의 유배지로 정권이 선호하는 극악지였다. 고산 윤선도가 이곳에서 5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경모재 방문 위에 붙어 있는 여의주를 문 용두

이진택은 덕봉정사에서 토함산을 넘어 동해안을 끼고 걸었다. 외가가 있는 영해에 들러 외씨묘에 절하고 울진 삼척 강릉 양양 간성 고성 통천을 거쳐 3월 6일 한 달 남짓 만에 유배지인 삼수 이영달(李英達)의 집에 도착했다. 그는 천 리 유배길을 가면서도 지나는 고장의 풍광과 인심, 유배 가는 심정을 일기로 남겼다. 특히 평해 월송정, 울진 망향정 삼척죽서루 강릉경포대 등 꿈에도 그리던 관동팔경을 다 돌아보고 글과 시를 남겼다.

그는 관동팔경의 마지막인 총석정에서 꿈에도 그리던 관동팔경을 다 볼 수 있었던 것 또한 임금의 은혜라며 자신에게 유배형을 내린 순조에 대해 충정 어린 심정을 표했다. "팔경이 바다와 접해있어 어느 것 하나 절경이 아닌 곳이 없지만 그중에서도 죽서루는 하얀 모래 위에 맑은 냇물이 못을 이루었고, 기암괴석은 좌우로 십 리 골짜기를 이루었는데, 넓은 바다와 어우러져 한 번만 보아도 심신이 상쾌해진다. 이곳이 강산의 제일이며 관동의 절경이다. 갑오년 가을, 금강산을 유람하고 경성으로 돌아갈 때 이곳을 보지 못했기에 평생을 두고 소원했는데 이번 귀양길에 곳곳을 다 보게 되니 이 또한 임금님의 은혜라 아니 할 수 없다"

▲ 김동완 자유기고가
유배지에서 그는 포항으로 가는 상인에게 편지를 부쳐 가족에게 안부를 묻기도 하고 울창한 숲 속의 매 둥지를 보고 떠나온 가족을 그리워했다. 백두산 변방 산간지역의 사람 사는 모습과 거기서 이뤄지는 무역과 인심, 명절날과 생일을 적관에서 보내는 우울한 심정을 시로 적기도 했다. 순조 4년(1803) 나라에 경사가 있어 ‘광탕지전(曠蕩之典·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시행하는 대사면 또는 특별사면)’으로 2년간의 유배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2월 16일에 해배됐으나 변방까지 조보가 늦게 도착 바람에 한 달 뒤에 유배지를 떠나게 됐다. 경주 집으로 돌아온 이진택은 익제 이제현을 모신 구강서원에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서책을 기증하는 한편 원장과 헌관을 맡아 후학을 양성했고 매월당 김시습 영당의 향사를 놓고 분쟁이 일자 이 문제를 사람에 호소하여 조정했다. 시조인 알평공인 탄강한 표암에 유허비를 세우고 종친을 규합하며 숭조사업을 벌였다. 1805년 68세를 일기로 고종했다. 덕봉정사 옆에 안장했다.

김동완 자유기고가
조현석 기자 cho@kyongbuk.com

디지털국장입니다. 인터넷신문과 영상뉴스 분야를 맡고 있습니다. 제보 010-5811-4004

www.facebook.com/chopms

https://twitter.com/kb_ilbo

https://story.kakao.com/chopms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