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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10년이 뭐 별건가? 젊어서는 그렇게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오늘 떠오른 태양이 어제의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고, 새해니 새날이니 하는 것들이 다 인간의 호사 취미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며칠 전, 아내와 먼 거리 가사출장을 다녀왔습니다. 도시 외곽에 자리한 양판점에 들러 생필품 몇 가지를 샀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참, 10년 빨리 가네”라고 말했습니다. 10년 전쯤 살던 옛 동네를 지나칠 때였습니다. 문득, 그때 일들이 떠올랐습니다.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오십 대 초반, 살 만큼 살았다고 여겼었는데 지금 그 나이 또래의 사람들을 보면 마치 청년처럼 보입니다. 활기가 넘치고, 눈빛이 초롱초롱한 게 정말이지 ‘진짜 사람’ 같습니다. 불과 10년,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것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어제는 10여 년 동안 머물던 직장의 제 거처를 이전하면서 그동안 쓰지 않고 보관만 하고 있던 것들을 깡그리 다 버렸습니다. 옷장에 묵혀두고 있던 옷가지들, 운동화, 등산화, 구두 몇 켤레, 테니스라켓 두어 자루, 비디오테이프 백여 장, 서류뭉치 한 리어카, 그것 이외에도 각종 ‘기타누락자’ 신세의 잡동사니들 서너 포대를 내다 버렸습니다. 보지 않는 책들도 많이 버렸습니다.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라는 소설이 생각났습니다. 결국, 제가 버린 그것들이 바로 저였습니다. 한 인간이 살아낸다는 것이 고작 저런 것들에 붙잡혀서 전전긍긍하는 것이었구나라는 다소 황망한 소회도 들었습니다(버리고 나니 기분이 상쾌했습니다).

10년 전에는 지금의 제 모습을 상상도 못 했습니다. 특히 인생 후반기의 십 년은 완전히 다른 세상입니다.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는 기분입니다. 10년 단위로 정치, 경제, 문화를 잘라 평가하는 일이 도로(徒勞)가 아님도 분명히 알겠습니다. 인생 100년, 10년이란 개념은 확실히 숫자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앞으로의 10년 동안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까요? 4차 산업혁명이 본격화되고 필연적으로 인간성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요구될 겁니다. 세상이 바뀌고 사람이 달라질 겁니다. 좀 늦은 사람들에게는 속전속결, 따져볼 겨를도 없이 모든 것이 이미 결정적으로 달라져 있을 겁니다. 미래학자들은 다가올 미래는 ‘변화’만이 변하지 않는 원칙이 되는 세상일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변화는 또 다른 곳에서도 발견된다.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 젊은 사이버 족들의 태도와 반응을 유심히 살펴본다면, 그들은 정보와 물질, 기계와 사고, 일과 놀이, 나아가 종교와 상업에 대해 전혀 구분을 두고 있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가장된 것이든 강요된 것이든, 엄숙성이 뼛속까지 침투해 있는 그들 부모 세대들과 그들은 전혀 다르다. 그들, 디지털 영역의 선두 주자인 사이버 족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해, 매우 이단적인, 그로테스크한 마술적 관념을 가지고 있다. ‘중략’ 그들은 스스로 신화를 쓴다. 그들은 신화와 현실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들의 기술에 대한 헌신과 집착은 기본적 진리에 대한 열정, 신원시주의적, 마술적 세계관들과 항상 공존한다. 그들은 그런 의미에서 이중적이고, 선형적이 아니다. 스크린 세대에게는 이러한 것들이 상충되는 삶의 전략들이 아니라 상시(常時) 변화를 위한 필수적이고 조화로운 동인들이다”‘더글러스 러시코프(김성기, 김수정 역), ‘카오스의 아이들’’

사족 한 마디 붙이겠습니다. 대선전(大選戰)의 윤곽이 점차 명료해지고 있습니다. 변화를 알고, 변화를 선도할 수 있는 후보가 최종적으로 국민의 선택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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