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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인물] 23. 구미시 선산읍

"조선 인재 반은 영남서 나고 영남 인재 반은 선산서 난다"

박용기 기자 ygpark@kyongbuk.com 등록일 2017년02월14일 19시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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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의 지나온 발자취가 곧 구미의 발자취라고 할 만큼 구미의 전통과 역사는 선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선산은 본래 일선군(一善郡)으로 신라 진평왕 36년(614) 사벌주(沙伐州)를 폐(廢)하여 일선주(一善州)를 설치하고 길찬(一吉) 일부(日夫)를 군주(軍主)로 두었다.

신문왕(神門王) 7년(687) 일선주를 파(罷)하고 다시 사벌주를 설치했으며 경덕왕(742~764) 때 숭선군(崇善郡)으로 고쳤다.

고려 성종 14년(995) 선주(善州)로 개칭(改稱)하고 자사(刺史)를 파견했다가 현종 9년(1018) 상주목(尙州牧)에 예속( 屬)됐으며, 고려 인종 21년(1143) 일선현으로 했다가 다시 지선주사(知善州事)로 승격됐다.

조선 태종 13년(1413) 선산군으로 되고 태종 15년(1415)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됐다.

1962년 1월 1일 구미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73년 7월 1일 칠곡군(漆谷郡) 북삼면(北三面) 낙계동(洛溪洞)이 구미읍에 편입됐다.

이후 1979년 5월 1일 선산면이 읍으로 승격됐으며, 1983년 2월 15일 옥성면 봉곡동(鳳谷洞), 포상동(浦上洞), 금릉군(金陵郡) 감문면(甘文面) 봉남동(鳳南洞), 소재동(所才洞)이 선산읍에 편입됐다.

봉황이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로 날아가려는 모습으로 선산읍을 감싸고 있는 비봉산이 주산으로, 예로부터 조선 인재의 절반은 영남에서 나고 영남의 인재의 반은 선산에서 난다고 할 만큼 많은 인물이 배출됐다.

□비봉산의 유래

구미시 선산읍 노상리에 있는 고도 122m의 산으로 지명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선산)에 “비봉산(飛鳳山)은 선산도호부의 북쪽 10보(步)에 있는 진산이다”라는 기록으로 처음 등장한다.
선산읍 전경, 뒤로 보이는 산이 비봉산이다.

여지도서 (선산)에는 “비봉산(飛鳳山)은 충청도 보은 속리산 동쪽에서 뻗어 나와 상주를 지나며 연악산을 이루고 다시 뻗어 나와 본 고을의 주산(主山)을 이룬다”는 기록이 있어 산줄기의 근원과 함께 선산의 주산임을 알 수 있다.

이후 해동지도 (선산), 대동여지도, 1872년 지방지도 (선산)에 ‘비봉산(飛鳳山)’이 기록되고 있어 지명의 강한 존속성을 확인할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천사들이 산봉우리를 메고 오는 것을 보고 두 처녀가 큰일 났다고 소리 지르며 집으로 달아나자 천사들이 이를 괘씸하고 불길하게 여겨 메고 오던 산봉우리를 그 자리에 내려놓으면서 비봉산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는 선산 지역이 예사롭지 않은 고장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비봉산의 유래는 선산 지역을 봉황이 깃드는 신령스런 고장으로 여기면서 이러한 정기를 잃지 않으려는 지역민의 소망이 엿보인다.

또한 산의 형세가 봉황이 두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과 같아 비봉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전설도 있다.

이후 봉황이 날아가지 못하게 하도록 주변에 봉황과 관련한 여러 지명을 붙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군이 비봉산을 보고 인재가 많이 날 것을 염려해 비봉산 주령의 허리를 끊고 장작으로 불을 피우고 쇠못을 박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선산읍이 배출한 인물

조선 인재의 절반은 영남에서 나고 영남의 인재의 반은 선산에서 난다는 이야기가 무색하지 않을 만큼 많은 인재가 선산에서 태어났다.

먼저 조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단종을 위해 사절(死節)한 사육신 중 한 명인 단계(丹溪) 하위지가 있다.
구미시 선산읍 죽장리 고방실마을에 있는 조선시대 문인 하위지의 묘

1412년(태종 12년) 선산읍 영봉리 (현재 완전리, 이문리, 노상리 일원)에서 태어난 하위지는 1438년(세종 20년) 문과에 장원급제해 집현전에서 많은 공적을 이루었다.

문종 때 병으로 낙향해 학문에만 전념할 때 김종서, 황보인 등이 수양대군에게 참살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이후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을 내쫓고 왕이 되어 하위지를 불렀으나, 뜻을 굽히지 않다가 단종복위를 계획하며 벼슬에 나갔다.

하지만 김질의 고변으로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유응부와 함께 참형을 당했다.

이들이 바로 죽음으로써 충절을 지킨 사육신이다.

선산읍 서쪽 단계천의 단계교 위에 하위지의 유허비 각이 있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12살 때 야은 길재에게 수학했으며, 조선 성리학의 기초를 다지는 데 이바지한 문강(文康) 김숙자도 선산읍 영봉리에서 태어났다.

김숙자는 정몽주에서 길재로 이어져 내려온 사림파 성리학의 도통(道統)을 계승하는 기틀을 닦았으며, 그의 학문은 아들 김종직이 이어받아 조선 전기 영남 사림파가 정치와 사상의 중심에 진입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전통문화 분야로는 우리나라 인간문화재 5호인 명창 박록주 선생이 있다.

1906년 선산읍에서 태어난 박록주 선생은 12세에 명창 박기홍(朴基洪)에게 소리를 배우기 시작해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춘향가〉 보유자로 인정됐으며, 1973년 〈흥보가〉 보유자로 재인정 됐다.

여성임에도 남성적인 동편제 소리의 맛을 제대로 구현했던 명창으로 평가되며, 일제강점기 대명창들의 법제와 더늠을 이어받아 후대에 계승했다.

무수한 공연과 음반 녹음을 통해 현대 판소리를 이끌었으며, 김소희, 박초월과 함께 현대 판소리사를 대표하는 여성 명창으로 꼽힌다.

현존하는 인물 중에는 노진환 (사)영남유교문화진흥원장을 빼놓을 수 없다.

1944년 선산읍 독동리에서 태어난 노진환 원장은 경상북도 버스운송사업조합 이사장, 한국자유총연맹 경북지회장. 민주평통 자문위원(현). 전국 버스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특히 지역의 뿌리와 정신을 찾기 위한 ‘경북의 혼’을 살리는 데 앞장서 안동 한국국학진흥원 설립의 산파 역할을 하기도 했으며, 야은 길재,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 선생의 기념관 설립운동도 펼치고 있다.

올해 연말 완공을 목표로 선산읍 독동리 일대에 공사가 한창인 영남유교문화진흥원 또한 국립 규장각, 한국국학진흥원과 성격이 같다.

이곳에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44호로 노 원장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 후기 및 대한제국 말의 전적과 고문서 19종, 35책 117매, 1폭과 임진왜란과 항일독립운동 자료가 전시될 예정이다.

이 밖에도 노무식 전) 재향군인회 부회장과 이경구 전) 55사단장, 심우섭 성신여대 사범대학 교수, 김규영 포항공대 교수, 최동환 전) 국민대 교수, 홍순철 전) 서울시의회 의원, 이욱열 한국지역 인터넷언론협회 회장 등이 비봉산의 정기를 받은 선산읍 출신으로 우리나라 정치, 경제, 교육, 언론 등의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다. 개교 106주년으로 전국 최초 교장, 교감 직선제를 자랑하는 대한민국 명문 사립 동덕여고 제10대 교장을 지낸 전상룡 전 교장과 구미시 의장을 역임하고 최근 선산 농협 조합장 보궐선거에서 신임 조합장으로 당선된 임춘구 전 의장 역시 선산읍이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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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기 기자

    • 박용기 기자
  • 김천,구미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