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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 55. 거창 요수정(樂水亭)

흐르는 위천에 수심 흘려보내며 다가올 때를 기다리네

김동완 자유기고가 등록일 2017년02월16일 17시15분  

요수정 측면에서 바라본 구연서원. 신권이 배향됐다.

위천(渭川)은 덕유산과 남덕유산 등에서 몸을 일으켜 덕유산의 남쪽, 남덕유산의 동쪽으로 흐르면서 황강으로 합류하는 하천이다. 중국의 강태공 여상이 낚시를 즐겼던 황하의 지류, 위수를 본 따 지은 이름이다. 위천면 상류의 개울을 웃내 또는 상천이라는 하는데 이를 한자로 적으면서 위천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남덕유산에서 흘러내린 월성계곡과 덕유산에서 시작한 송계사 계곡이 갈계숲에서 합류해 내려와 수승대(搜勝臺)거북바위 옆에서 소를 이루니 구연(龜淵)이다. 수승대는 생긴 모양이 거북같다고 해서 거북바위로도 불린다.

요수정은 요수 신권이 제자들을 자르치던 강학소다.

수승대 일원은 요수(樂水) 신권(愼權1501~1573)이 벼슬을 떠나와 은거하며 살던 곳이다. 수승대의 본래 이름은 수송대(愁送臺)다. 삼국시대 때 백제의 사신을 신라로 보내면서 전별하던 장소라고 한다. ‘근심스럽게 보내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백제 말기, 국력은 쇠퇴할 대로 쇠퇴했고 신라는 삼국의 최강국으로 성장해있었다. 백제는 신라에 대해 늘 아쉬운 쪽이었다다. 신라로 떠나는 백제의 사신들은 치욕을 감내하며 외교전을 벌여야 했다. 떠나는 발걸음이 어찌 근심스럽지 않겠는가.

요수정과 거북모양의 수승대가 서로 마주보며 서 있다

수송대를 수승대로 바꾼 이는 퇴계 이황이다. 수승대는 조선 선비의 ‘죽기전에 꼭 가봐야할 곳’ 중 하나다. 1543년 이황은 장인 권질의 회갑을 맞아 거창 영승마을을 찾았다. 권질은 여기서 ‘농월정’을 짓고 우거하고 있었다. 당연히 수승대를 찾아가 신권을 만날 작정이었다. 자동차로 10분 거리다. 그러나 임금이 급히 호출하는 통에 만남은 이뤄지지 못했다. 임금의 부름을 받고 돌아가는 이황이 신권에게 편지를 보냈다. 수송대라는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니, 수승대로 바꾸자는 요지였다. 시까지 보내왔다.

요수정은 지자요수 인자요산의 요산요수에서 따온 이름이다.


수승(搜勝)이라 대 이름 새로 바꾸니

봄 맞은 경치는 더욱 좋으리라.

먼 숲 꽃망울은 터져 오르는데

그늘진 골짜기엔 봄눈이 희끗희끗.

좋은 경치 좋은 사람 찾지를 못해

가슴 속에 회포만 쌓이는구려.

뒷날 한 동이 술을 안고 가

큰 붓 잡아 구름 벼랑에 시를 쓰리라.

요수정에서 보는 구연서원

대학자의 요청을 받은 신권은 ‘깊은 마음 귀한 가르침 보배로운데 서로 떨어져 그리움만 한스럽네’라는 화답시를 짓고 바위에 ‘수승대’라는 각자를 새겼다. 신권의 처남 임훈은 생각이 달랐다. 그는 퇴계와 동갑나이였다. 아무리 당대의 대학자이라 하더라도 와보지도 않고 조선의 명승지 이름을 마음대로 바꾸는 일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도 화답시를 지었다. “강가에 꽃이 가득하고 동이에 술도 가득한데 / 소맷자락 이어질 듯 노니는 사람들 분분하네 / 봄은 장차 저물고 그대도 장차 떠나니 / 봄을 보내는 시름 뿐만 아니라 그대를 보내는 시름도 있다네” ‘그대도 장차 떠나니’라는 싯귀에서 이방인에 대한 토착민의 경계가 보인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남의 고장 경승지 이름에 무슨 상관인가, 비틀린 심사가 보인다. 특히 마지막연에서 이황이 아름답지 못하다는 ‘수송대’의 ‘수(搜,근심)를 두 번씩이나 쓰면서 수백년 이어온 경승지 명칭 개명에 은근히 반발하고 있다.

신권은 수송대의 동쪽에 구주서당(훗날 구연서원)을, 위천 건너 서쪽에 요수정을 짓고 후학을 양성했다. 요수정은 1542년(중종 37) 구연재와 남쪽 척수대 사이에 건립됐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1805년 후손들이 현 위치인 수승대 건너편 솔숲으로 이건하였다.

요수정에서 보는 수승대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이다. 자연암반을 초석으로 이용하였으며 마루는 우물마루다. 사방으로 계자난간을 둘렀다. 네 곳의 추녀를 받치는 활주를 두었고 부챗살 형태의 서까래를 배치했다. 가운데 뒤쪽 1칸에 방을 들이고 나머지는 모두 마루다. 12개의 기둥에 오언시를 쓴 주련을 달았다. 건물의 좌향은 정동향에서 남쪽으로 15도 정도 틀어 앉았다. 자연암반을 초석으로 하다보니 그렇게 됐다고 한다.

과연 조선 선비들의 버킷리스트에 들 정도로 아름다운 정자다. 정자에 올랄 정면을 보면 거북모양을 한 수승대가 눈에 들어온다. 대는 푸른 소나무 숲을 면류관처럼 쓰고 있고 바위 몸통에는 시와 사람이름이 새겨진 각자가 빼곡하다. 바위 아래에는 월성계곡과 송계사 계곡에서 내려온 에메랄드 빛 물이 눈부시다. 구연이다. 수승대에서 시선을 약간만 오른쪽으로 돌리면 구연서당 관서루가 시야에 포착된다. 관수루와 관수루를 시위하고 있는 굽은 소나무가 아름답다. 정자 안에서 강을 따라 시선을 오른쪽 돌리면 소나무 숲이 우거진 섬이 보인다. 본래는 모래톱이었는데 신권이 제자들과 함께 소나무를 심어 숲을 만들었다고 한다. 섬솔이라고도 하고 강숲이라고도 한다. 정자 뒤는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야트막한 동산이 병풍처럼 막아서고 있어 포근하다.

정자 안은 이곳을 방문한 선비들의 시와 기문으로 빽빽하다. 신복명의 ‘요수정 중건기’ 거창 부사 김인순의 ‘삼가 퇴계선생 운을 따라’ 등의 현판이 가득하다. ‘요수정’이름은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 智者樂水仁者樂山’는 《논어》〈옹야〉편에서 ‘요수’만 따왔다. 신권은 그 이유를 시로 적어 정자 안에 현판으로 남겼다.

산수간에 정자를 지어

물을 사랑하고 산을 버린게 아니라

물은 산 가장가리에서 나오고

산은 물 위를 따라 둘러있도다

신령한 구역이 이로부터 열리니

즐거워하는 뜻과 서로 관련있다네

그러나 인자와 지자의 일 생각하니

모든 것이 오히려 부끄럽다

요수 기념비는 태풍 산바내습당시 정자를 덮치는 거대한 소나무를 막아 정자를 구했다.

신권은 선교랑 훈도를 끝으로 벼슬을 떠났다. 수승대 주변에 자신의 은거지를 확보한 뒤 긴 세월 후학을 양성하며 학자로서의 명승을 떨쳤다. 신권이 미관말직을 끝으로 고향에 은거한데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무관치 않으리라 말이 있다. 거창 신씨는 한때 권문세가로 기세를 떨쳤다. 그 중심에는 신승선(1436~1502)이라는 인물이 있다. 신승선은 세종대왕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1418~1469)의 사위였다. 임영대군이 수양대군의 집권을 도운 덕에 신승선은 탄탄대로를 걸었다. 딸을 연산군에게 시집보내고 연산군이 왕이 되자 ‘거창부원군’에 영의정까지 올랐다. 그의 아들 신수근도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 딸을 진성군(후일 중종이 됨)에게 시집보냈다. 그러나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신수근은 물론 아우 수영 수겸이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한다. 단경왕후도 쫒겨나 폐비 신씨로 전락했다. ‘인왕산 치마바위’ 이야기는 중종과 단경왕후의 슬픈 사랑이야기다.

중종반정이후 거창신씨의 전성시대는 막을 내렸다. 신권이 장성해 벼슬살이를 할 때까지 조정내에서 거창신씨에 대한 견제가 상당히 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신권은 ‘곤궁해지면 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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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완 자유기고가
자신의 몸을 잘 살피고,때가 오면 천하 일은 도모하라(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는 맹자의 말을 떠올렸을 것이다. 후학을 양성하면서 때를 기다리는 의미는 이곳을 흐르는 내를 ‘위천’이라고 한데서도 찾을 수 있다. 위천은 중국의 강태공 여상이 낚시를 하던 위수에서 따온 이름이다. 강태공은 위수에서 낚시를 하다가 주문왕에 발탁돼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평정해 제나라 시조가 됐다. 신권은 자신의 은거하는 삶에 대해 “하늘이 내린 벼슬은 내게 있고, 사람이 내린 벼슬은 남에게 있으니, 내 어찌 내 것을 버리고 남에게서 구하리오”라고 말하곤 했다. 신권의 은거지인 수승대 일원을 후손들이 ‘요수신선생장수지지 樂水愼先生藏修之地’라 부르는데도 그런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신권은 요수정 건너편에 구연서원에 배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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