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경 그림과 글/남해의 봄날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 구판장을 아시나요? 그 옛날, 지나가는 사람들의 쉼터, 동민들의 사랑방, 밤새 동네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들이 모여들던 곳. 아낙들의 수다로 한숨과 웃음꽃이 교차하던 곳. 형형색색의 과자 봉지가 아이들을 유혹하던 곳. 누렇게 빛바랜 외상장부가 홀로 지키던 그곳, 장부가 늘어나도 독촉이 없던 그곳. 그곳이 문득 그리워질 때가 있다. 세월이 흐른 탓이 아니라 사람 냄새가 그리운 때문이리라. 해가 저물고 동네가 어두워져도 가게 앞은 전봇대 가로등 불빛으로 환하게 밝아 저녁 먹고 나온 아이들이 하나둘 모여 한바탕 놀아대는 신나는 놀이터가 됐다. 다방구,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신발 감추기 등을 하며 맘껏 뛰어놀고 머리 맞대고 달고나 해 먹던 최고의 놀이공간이었다. 유년 시절 가장 즐거운 기억이 구멍가게에 숨어 있다.”

아이 둘을 낳고 캔버스 앞에 다시 앉았다. 붓을 놓은 지 이삼 년 정도 지났을 때였다. 어쩌다 경기 광주 퇴촌에 깃들어 살고 있었는데, 벚꽃 눈 흩뿌리는 날 관음리 구멍가게를 찾았다. 집에서 걸어 30분 거리, 보랏빛 슬레이트 지붕의 구멍가게가 갑자기 낯설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다가왔다. 가게를 그리기 시작했다.

“가슴이 뛰고 즐겁고 행복했다. 그렇게 구멍가게와 나의 인연은 시작됐다.”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은 이렇게 시작됐다. 1998년 관음리 구멍가게를 시작으로, 지난 20년 동안 전국 방방곡곡의 구멍가게를 찾아다니며 그림을 그렸다(울릉도는 미처 못 갔다고 한다). 이제 불혹의 나이를 뒤로하면서 그동안의 그림과 글을 갈무리해 한 권의 책으로 묶어냈다.

‘동전 하나로도…’의 표지를 여는 독자는 누구나 먼저 그림에 눈길을 빼앗길 것이다. 첫 쪽의 ‘봄날 수리산에서’(2015년 작) 그림에는 목련꽃이 활짝 핀 나무 뒤로 시골 구멍가게가 소박하게 앉아있다. 이어 ‘봄날 가게’(2016년 작)에는 목련나무 뒤로 빛바랜 파란색 양철 지붕의 구멍가게가 나무문틀과 붉은색 우편함과 함께 정겹다. 이제 막 바깥일을 마치고 돌아온 주인장이 세워놓았을 자전거가 나무 옆, 그러니까 그림의 한가운데 세워져 있다.

책에 실린 80여점의 그림은 이처럼 거의 전부 구멍가게가 주인공이다. 화사한 봄꽃에서 겨울의 함박눈까지, 계절은 변해도 “그림 속 시간은 멈춰 있다”. 그리고 항상 나무가 함께한다. 구멍가게와 나무, 그런데 지은이는 하나가 더 있다고 했다. “가게는 항상 손님 맞을 준비를 한다. 묵묵히 세상을 응시하면서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구멍가게, 그리고 나무, 사람을 기억한다.” 주인이나 손님이 감춰져 있지만, 분명 그림 안에 있다는 것이다.


곽성일 기자
곽성일 기자 kwak@kyongbuk.com

행정사회부 데스크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