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_대구교대교수2014.jpg
▲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아내와 모자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누가 그렇게 물었습니다. 언뜻 생각이 잘 나지 않습니다. 내게 가깝고 따듯한 존재? 일상의 보호자? 아니면 성적(性的) 파트너? 마지막 생각은 프로이트의 생각을 빌린 것입니다. 프로이트는 모자나 냄비 같은 것들을 여성 상징으로 간주했습니다. 반대로 담배 파이프나 지팡이 같은 것은 남성 상징으로 간주했고요.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지만, 마음에 쏙 드는 대답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우스개로 ‘항상 머리 위에서 논다’ 같은 것도 생각해 보지만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아내는 사람이고 모자는 사물인지라 그 역할과 가치에서 비교 기준점을 찾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유(類)가 다른 것들을 견줄 때는 흔히 비유를 동원합니다만 그 결과가 앞에서 말씀드린 프로이트의 설명 정도가 고작입니다. 특별하게 그 두 가지 개념이 한데 엮이는 경험을 해보지 못한 저로서는 그 질문에 만족스러운 대답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제 상상력의 범주를 훨씬 벗어나 있습니다. 별수 없이 질문을 부정합니다. 

아내와 모자를 비교해서 그 공통점을 찾으라는 것은 적절치 못한 질문이다, 그렇게 결론을 냅니다. 천재가 아닌 한, 아내와 모자를 동일시할 수 있는 아주 특수하면서 일반적인 특별한 경험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 질문에 속 시원히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특별한 경험도 없이, 천재적인 상상력의 소유자도 아니면서, 아내와 모자를 동일시한 사내가 있습니다. 바로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의 반응은 아주 이상했다. 그의 눈은 내 얼굴을 쳐다볼 때처럼 여기저기로 빠르게 옮겨 다니며 각각의 세세한 특징을 잡아냈다. 그중에서도 특히 밝게 빛나는 것이나 색채, 형태에 대한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설명을 했다. 그러나 결코 장면 전체를 파악하지는 못했다. 마치 레이더 화면이라도 확인하는 것처럼 사소한 것은 잘 보았지만, 전체적인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사진의 전체적인 인상에 대해서는 관심도 두지 않았고 말을 하려 들지도 않았다. 풍경이나 전체적인 장면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모래 언덕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사하라 사막의 사진이 실린 잡지의 표지를 보여주었다.

“이 사진이 뭐로 보이시나요?”

“강이군요. 물 위로 테라스가 딸린 작은 집이 있고, 사람들이 테라스에 나와 식사를 하고 있구요. 색색의 파라솔이 여기저기에 보이네요” 그는 사진에 있지도 않은 것들을 꾸며내서 말하고 있었다. ‘중략’ 그는 검사가 다 끝났다고 여겼는지 모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는 손을 뻗어 아내의 머리를 잡고서 자기 머리에 쓰려고 했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것일까? 그런데도 그의 아내는 늘 있어온 일이라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올리버 색스, 조석현 옮김,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아마 전두엽 부분에 이상이 있었던 모양입니다만,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자신이 어떤 질병을 가진지도 몰랐습니다. 결국, 인지적 판단의 문제였습니다. ‘판단이란 개인적인 동시에 종합적이고 구체적인 것’인데 그런 종합적인 뇌 기능이 크게 손상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판단중지 상황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 집단에서도 왕왕 일어납니다(특히 대구-경북).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보면서 저 스스로도 반성을 해 봅니다. 모든 게 있던 자리에 있어야 편합니다. 급변하는 것들은 늘 불안을 선사합니다. 저 역시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인 모양입니다. 오늘 밤, 누워 잠든 아내의 머리라도 슬쩍 한 번 어루만져 봐야겠습니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