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일부가 된 누각…눈길 닿는 곳 어디나 풍류 가득

▲ 관수루는 자연 암밤 위에 세워진 누각으로 안에서 내려보는 위천과 요수정, 수승대가 절경이다.

거창군 위천면 대정리에 있는 관수루는 요수정(樂水亭), 수송대거북바위와 함께 수송대 일원의 명승을 압도하는 ‘트리플 크라운’이다. 위천 맑은 물에 몸을 담근 수승대를 가운데 두고 동서로 날개를 편 요수정과 관수루가 계곡을 찾는 이를 압도한다. 

관수루 안에서 보는 수승대 거북바위


관수루는 요수정과 마찬가지로 요수(樂水) 신권(愼權)과 관련된 누각이다. 신권은 요수정을 건축하기 2년 전인 1540년(중종 35) 이곳에 구연재(龜淵齋)를 짓고 제자를 양성했다. 제자들이 많이 몰렸던 모양이다. 다음해에 함양재(涵養齋)를 짓고 그 다음해에 요수정을 지어 후학들을 양성했다. 그가 죽은 뒤 100년이 더 지난 1694년(숙종 20) 지방 유림이 구연재 자리에 구연서원을 창건하고 신권을 배향했다. 이후 석곡 성팽년과 황고 신수이를 추가배향한 뒤 이 지역 유학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 훼철됐다.

관수루 누각 안에서본 요수정


신권과 함께 배향된 성팽년은 안음 출신으로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유생으로 공부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안음에서 기병유사로 창의문을 발통하는 등 의병활동을 하였다.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고, 의약·복서 산경 ·지지 여러 분야에 달통했다. 갈천 임훈의 제자다. 황고 신수이는 영조때 학자로 현재의 황산고가마을에 입향하면서 마을을 더욱 번창시킨 인물로 알려졌다. 수승대 아래에 섬숲은 신권이 소나무를 심어 조성했는데 신수이가 나중에 나무를 더 심어 지금의 무성한 숲을 만들었다고 한다. 영조 때 ‘무신란’ 이후 왕에게 무민책을 건의하면서 이름을 떨쳤다.

구연서원의 본건물인 강학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구조다. 좌우에 각각 방 한 칸을 두었고 나머지는 마루다. 서원 마당 동쪽에 ‘산고수장비’와 ‘석곡성선생비’, ‘황고신선생비’가 남아있다. ‘산고수장 山高水長’은 ‘산은 높고 물은 유유(悠悠)히 흐른다는 뜻으로, 군자의 덕이 높고 끝없음을 산과 냇물에 비유한 말이다. 구연서원이 군자를 양성하고 기르는 장소라는 뜻이기도 하다.

관수루 앞에 세워진 요수신선생장수지소 문

구연서원 안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구사구용 九思九容’ 현판이다. 율곡 이이의 ‘격몽요결’에 나오는 말이다. 군자가 가져야 할 아홉 가지 생각과 태도다. ‘아홉 가지 생각’은 “볼 때는 환히 볼 것을 생각하고, 들을 때는 똑똑하게 들을 것을 생각하고, 안색은 온화하게 가질 것을 생각하고, 태도는 공손할 것을 생각하고, 말은 진실 될 것을 생각하고, 일할 때는 조심할 것을 생각하고, 의심날 때는 물어볼 것을 생각하고, 화가 날 때는 곤란하게 될 것을 생각하고, 이득이 생기면 의리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아홉 가지 태도’는 “걸음걸이는 무겁게 하고, 손은 공손하게 가지며, 눈은 바르게 뜨며, 입은 다물고 있으며, 말소리는 조용히 하며, 머리는 곧게 들며, 숨소리는 정숙하게 하며, 서 있는 모습은 의젓해야 하며, 얼굴빛은 위엄이 있게 한다”는 것이다.

관수루는 구연서원의 문루이다. 구연서원을 짓고도 한참이 지난 1740년에 건축됐다.병산서원의 만대루, 남계서원의 풍영루와 마찬가지로 누 아래는 출입문인 외삼문 역할을 하고 누 위의 마루는 주변경관을 감상하며 휴식을 하거나, 시회를 열고 강학하는 곳이다. ‘관수’는 《맹자》〈진심장구〉상편 “물을 보는데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흐름을 봐야 한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다음으로 흐르지 않는다 / 觀水有術 必觀其瀾 流水之爲物也 不盈科不行”에서 가져왔다. 맹자의 이 아포리즘은 조선시대 누정 현판 작명분야에서 정상급 인기를 누렸다. ‘관수’ ‘관란’ 외에도 ‘영과’와 같은 현판이름이 다 여기서 나왔다. 맹자의 ‘관수’는 물의 흐름, 즉 맥락을 읽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관수루는 물을 볼 때는 흐름을 봐야 한다는 맹자의 말에서 따왔다.

관수루는 자연암반 위에 세워졌다. 자연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애쓴 흔적이 뚜렷하다. 누각을 떠받치는 앞쪽 누하주는 속칭 ‘짝다리’다. 동쪽 기둥은 짧고 서쪽 기둥은 길다. 동쪽 기둥 아래 바위가 높이 솟았고 서쪽 기둥 아래 바위가 낮게 엎드렸기 때문이다. 자연석 바위를 그대로 활용하다 보니 생긴 지혜다. 뒤쪽 누하주는 기가 막히게 아름답다. 병산서원 만대루에서 보았던 구불구불한 기둥 보다 더 구불구불하다. 마치 용이 용틀임을 하는 형상처럼 보인다. 이런 나무 기둥을 구하려면 꽤 애를 먹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수루에는 누각으로 오르는 계단이 없다. 누각을 받치고 있는 동쪽의 거대한 바위가 계단이다. 비스듬히 누운 바위를 올라가면 바위의 꼭대기 부분이 누각 마루와 평행을 이룬다. 바위에서 마루로 발을 옮길 때 알게 된다. 누각도 자연의 일부이구나.

관수루를 떠받치고 있는 자연석 암반 사이를 뜷고 자난 소나무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계자난간을 둘렀다. 팔작지붕에 처마의 네 귀에 활주를 달았다.이곳을 찾은 시인 묵객들의 기판과 시판으로 빽빽하다. 천장 아래는 빽빽이 들어선 현판으로 빈 자리가 없다. 조영서의 ‘구연서원 관수루기’와 황고 신수이의 ‘관수루’ 퇴계 이황의 ‘수승대’ 갈천 임훈의 ‘수송의 뜻을 풀어 제군에게 보이다’등의 현판이 걸려있다.



구연의 근원은 사수 물가에 다았고

출렁이는 맑은 물결 묘정을 둘렀네

뒤섞여 이어와도 근본 일는 줄 알겠고

유유히 지나가니 스스로 멈추지 않네

구덩이를 채웠다고 어찌 천굽이 지나기를 꺼릴까

용감히 나아가면 마침내 사해에 이를 터이니

관수루라 이름한 것 참으로 의미 있어

유형을 보는 곳에서 무형을 깨닫노라

- 황고 신수이의 시 ‘관수루’

관수루에는 누각으로 오르는 계단이 없다. 누각을 받치고 있는 거대한 바위를 계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관수루에서 보는 바깥 세상은 참으로 경이롭다. 누각 난간 앞으로 소나무가 아예 드러누워 큰 줄기를 뻗어냈다. 그 너머 맑고 푸른 위천이 보이고 위천 건너편 동산, 소나무숲 아래 학처럼 자리 잡은 요수정이 눈에 들어온다. 바위를 두드리거나 바위 구멍을 채우며 지나가는 물소리는 늦겨울 바람소리보다 더 맹렬하다. 이곳에서 바람은 그저 물소리를 따라 가는 ‘물의 종자’ 같다. 아름다운 풍경을 들여다 보고 있자니 비워내고 덜어내는 도가적 삶을 완성하기에 더 적당한 곳이 아닌가 싶다. 누각에서 물을 따라 조금 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이 절경의 대표선수, 수승대가 보인다. 바위에는 퇴계 이황의 시와 갈천 임훈의 시 그리고 누군지 모를 이들이 새긴 자신의 이름으로 빼곡하다.
관수루의 누하주구불구불한 기둥이 용이 용틀임을 하는 듯 하다

수승대는 아름다운 풍경과는 달리 거창신씨와 은진임씨의 주도권 다툼의 흔적으로 가득하다. 바위에 새겨진 각자가 모두 신씨문중과 임씨문중의 주도권 쟁탈전의 결과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신씨 문중이 바위에 ‘요수장수지대(樂水藏修之臺)’라는 글자를 새겼다. 신권이 숨어서 수양하던 곳이라는 뜻이다. 그러자 임씨 문중이 나섰다. 퇴계의 시와 임훈의 화답시를 새겼다. 퇴계 시 옆에는 ‘퇴계명명지대(退溪命名之臺)’라 새기고 임훈 시 옆에 ‘갈천장구
김동완 칼럼리스트.jpg
▲ 김동완 자유기고가
지소(葛川杖屨之所)’라 새겼다. 갈천이 지팡이를 짚고 짚신 끌던 곳이라는 뜻이다. 신씨문중이 ‘숨을 장’ ‘장수지대’라고 하자, 임씨문중은 ‘지팡이 장’자 ‘장수지소’라고 다소 시니컬하게 대응했다. 다시 신씨 문중이 신권을 배향한 구연서원 앞 바위에 ‘樂水愼先生藏修洞(요수신선생장수동)’이라고 큰 글씨를 새기고 임씨 문중과 신씨문중은 번갈아가며 바위에 자기네 이름들을 차곡차곡 새겼다. 바위는 이 두문 중 사람들의 이름으로 거대한 집단 묘비명이 됐다.‘물의 흐름’을 봐야한다는 ‘관수루’에서 수승대 바위를 전쟁터 삼아 시와 이름을 하나라도 더 새겨 넣어 주도권을 쥐어보겠다는 두 문중의 혈투를 요수 신권은 어떻게 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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