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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태 전 검찰총장

識淺名高世危亂 (식천명고세위란·어지러운 세상에 식견은 얕으면서 이름만 높으니)

不知何處可藏身 (부지하처가장신·몸을 숨길 만한 곳이 어디인지 모르겠구나)

漁村酒肆豈無處 (어촌주사기무처·어촌이든 술집이든 어찌 장소가 없겠냐마는)

但恐匿名名益新 (단공닉명명익신·이름을 숨길수록 이름이 더 알려질까 두려울 뿐이다)



경허 성우 스님은 9세에 과천 청계사로 출가하여 불교 경전은 물론 유교 경전과 제자백가서를 두루 섭렵했다. 32세에 돌림병이 유행하던 마을을 지나다가 생사의 한계를 느끼고 용맹정진하여 크게 깨달았다. 그 후 도처에서 선풍을 휘날리며 조선 후기 불씨마저 꺼져 가던 불교, 특히 선불교를 일으켜 세웠다.

이후 술도 마시고 문둥병 여자를 거두어 주는 등 범인(凡人)이 이해하기 어려운 기행을 서슴지 않으면서도 만공(滿空)·혜월(慧月)·수월(水月)과 같은 탁월한 제자를 길러 근대 한국 불교가 일어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말년에는 장발유관(長髮儒冠)으로 바라문 노릇을 하면서 서당 훈장이 되어 글을 가르치다가 입적했다.

경허의 이러한 행적에 대하여는 시비가 많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경허는 선풍을 다시 일으키기도 했지만 경허 이전의 선풍을 죽이기도 했다”고 말한다. 확실히 경허의 선풍은 독특한 것이었다. 백파(白坡)를 통해 이어진 경허 이전의 선풍은 서릿발 같은 계행을 바탕에 깔고 있었지만, 경허는 그러한 계행이나 율행을 비웃기라도 하듯 거리낌 없이 살았다. 문둥병을 앓던 여자와 함께 지내다가 낫지 않는 피부병을 얻은 뒤, 그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영영 절집과 승가를 떠나 버린 경허.

경허의 큰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한암(寒岩)은 후학들에게 “경허의 눈 밝음은 볼지언정 행동은 보지 마라”고 가르쳤는데 그것은 행동은 흉내 내기 쉽고 밝은 눈은 얻기 어려움을 깨우쳐 주는 이야기이다.



스님은 이 시에서 수행하기 어려운 환경을 깊이 토로하고 있다. 말법 시대 산중에서마저 수행은 차치하고 명리만 좇는 무리들이 득실거려 보림마저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스님이 저잣거리로 나와 바라문 행세를 한 연유를 유추할 수 있는 글이 아닌가 한다. “대나무 그림자가 섬돌을 쓸지만, 티끌 하나 움직이지 않고, 달빛이 바닷물을 뚫어도 파도에는 흔적이 없네(竹 影掃?塵不動 月光穿海浪無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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