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_대구교대교수2014.jpg
▲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취미생활로 시작한 운동(검도)인데 자의 반 타의 반 지도자 생활로 접어든 것이 20년 가까이 됩니다. ‘나는 바담 풍(風)’ 해도 너희는 바람 풍 하라‘ 는 식으로 가르친 제자들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수백 명에 이릅니다. 며칠 전에는 동문수학한 국가대표급 사범이 도장을 방문해 한 수 지도를 베풀었습니다. 모범적인 동작, 기술을 보여주는 한편, 한 사람 한 사람 붙잡고 그에게 꼭 필요한 지도 조언을 해주고 갔습니다. 칼을 드는 동작이 나쁜 사람, 치고 나갈 때 발동작이 잘못된 사람, 치고 난 후 자세가 흐트러지는 사람, 거리를 모르는 사람, 기합이 부족한 사람, 착장(着裝)이 어설픈 사람,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과오를 인정했습니다.

그런 광경을 보면서 기분이 착잡해졌습니다. 저에게도 늘 지적받아 온 것인데 왜 안 고치고 있다가, 기다렸다는 듯이, 집안 망신을 시키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왜, 그런 지적들이 마치 처음 듣는 것인 양 하릴없이 고개까지 끄덕이는 것인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문득 옛날 선비들이 제 자식은 못 가르치니 서로 자식을 바꾸어서 가르쳤다는 것이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좋게 생각했습니다. 가르치는 일에서는 섭섭한 내색을 함부로 내비치면 안 됩니다. 40년 가까이 교단을 지켜온 ‘늙은 말’의 경험칙입니다. 이번에도 “내가 지적한 것을 똑같이 지적하지?”라고 한 마디 던지는 선에서 넘어가야 합니다. 더군다나 어린 학생들도 아니고 모두 나이 든 제자들입니다. 나이 들어 배우는 신세의 ‘깨어지기 쉬운 자존심’을 존중해야만 합니다. 스스로 깨쳐서 자발적으로 동조(同調·남의 주장이나 가락을 따름)할 수 있도록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안내해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동조의 기쁨’이라는 본능이 있습니다. 서로서로 곁눈질하면서, 서로 간의 차이를 줄이고, 알게 모르게, ‘함께하는 열락(悅樂)’을 추구합니다. 그런 집단적 동일성에 대한 무의식적 충동이 있어야 종교도 되고 정치도 됩니다. 운동이나 여타의 취미생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서로 같은 것을 좋아한다는 동조의 기쁨이 있어야 오래, 열심히, 기분 좋게, 할 수 있습니다. “인지과학자 바실리 클루차레부는 ‘뉴런(Neuron)’ 1월 15일 자에 뇌 안에서 집단행동에 동조화(conformity)하는 메커니즘을 밝혀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클루차레부는 여자 24명에게 다른 여자 200여 명의 매력을 평가해 줄 것을 요청했다. 실험 대상자들은 자신의 평가가 다른 사람들의 평가와 다를 때 일치시키려고 노력했다. 이들의 뇌를 기능성 자기공명영상(fMRI) 장치로 들여다보고 사회적 동조화를 시도할 때 도파민이 다량으로 분비되는 것을 확인했다. 신경 전달 물질인 도파민은 어떤 일을 성취하거나 섹스를 할 때처럼 쾌감과 행복감을 느끼면 분비된다. 이 연구는 사회적 동조화의 신경과학적 근거를 밝힌 성과로 평가된다” (조선일보,‘이인식의멋진 과학’)

물론, ‘동조의 기쁨’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독재자들이 ‘조자룡 헌 칼 쓰듯’ 사용한 사술(邪術) 역시 바로 그것입니다. 히틀러가 제복과 대오(隊伍)를 이용해 군중의 영혼을 유린하고 인류사에 지울 수 없는 큰 상처를 남긴 것이 그 대표적 사례가 됩니다.

순기능이든 역기능이든, 사회적 동조화는 인간생활의 시도동기(Leit-motif)로 작용합니다. 없으면 안 됩니다. 한 종교 지도자는 모여서 같이 기도하는 것 그 자체가 구원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동조화의 기반이 붕괴된 사회는 위험합니다. 최근 국정농단과 탄핵 정국과 관련해서 대구·경북 사회의 좌절감이 남다릅니다. 아무쪼록 현재의 ‘동조의 슬픔’에서 속히 벗어나, 마땅하고 옳은, 새로운 ‘동조의 기쁨’을 다시 찾아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