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여 년 흘러도 조상들의 항일 정신이 살아 숨쉬는 마을

도진리 마을전경
일제 강점기 만세운동의 또 다른 진원지인 경북 고령군 우곡면 도진리를 재조명 해본다.

우리나라 경북 남단 끝자락에 위치한 조그만 시골마을을 주목한다.

전체 마을주민 가운데 독립만세를 외치며 일본에 항거하다 아녀자를 제외한 청장년 모두가 옥살이를 한 고령군 우곡면 도진리는 고령 박씨 집성촌이다.

우곡면 도진리 고령 박씨 후손들이 3·1운동 당시 만세운동을 하다 옥고를 치른 조상들의 재판 판결문을 살펴보며 선조들의 항일정신을 되새겨 본다.

한 세기 가까운 세월이 흐른 탓인지, 1919년 기미년 3·1운동이 역사의 책갈피에서나 볼 수 있는 ‘죽은 역사’가 되고 있는 분위기다.

하지만 고령군 우곡면 도진리에 사는 고령 박씨 문중 사람들에게는 3·1운동은 아직도 피가 펄펄 끓어 넘치는 ‘살아있는 역사’이다.

고령군 우곡면 도진리 고령박씨 세거지촌 비석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 고초를 겪은 조상들의 항일 정신을 후손들이 가슴 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다. 고령 박씨 문중 인사들을 비롯한 주민 27명이 단체로 옥고를 치른 3·1운동의 역사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남다른 자부심을 갖고 있다.

3·1운동 1개월여 뒤인 4월 6일. 고령 박씨 10세인 승로 조(祖) 묘지에 흙을 얹는 개사토 무렵 26세 후손인 박재필(당시 35세)은 일족과 가복(家僕)들에게 일본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면서 독립을 위해 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제의했다. 이날 저녁 박재필은 마을 주민 100여명을 규합해 나팔을 불고 태극기를 흔들며 도진리에서 5㎞ 떨어진 고령경찰서 개진면 지서까지 가두행진을 벌였다. 이날 만세운동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이튿날인 7일 일본 경찰은 도진리에 들이닥쳐 박재필 등 만세운동 주동자를 붙잡고 주민들을 위협했다. 만세운동이 확산될 것을 우려해 일본 경찰은 마을 주민을 강제로 모아 시국 강연을 열면서 집단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에 격분한 박채환(당시 37세)은 강연이 끝나고 돌아가는 주민들에게 독립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만세를 선창했다. 이에 주민들이 호응하자 일본 경찰은 박채환을 체포했다. 이 소식을 접한 박기로(당시 28세)는 강 건너 우곡면 대곡리로 달려가 한이군, 한용발, 박용학 등 뜻있는 청년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마을 주민 50여명과 함께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며 또다시 만세운동을 벌였다.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확산되자 일본 경찰은 경찰관 수십 명을 동원해 만세운동에 참여한 주동자는 물론 주민 모두를 연행, 대구형무소에 수감했다. 당시 40가구였던 도진리 마을에 어른들이 순식간에 없어졌다는 말이 전해오는 것으로 미뤄 당시 마을의 모든 성인들이 만세운동에 가담했고, 일본 경찰에 연행됐다.

연행된 주민 가운데 박재필과 박채환, 박기로 등 27명(도진리 20명, 이웃 마을 7명)은 재판에 넘겨져 그해 5월 대구지방법원에서 박재필은 징역 1년 6월, 박채환과 박기로, 박영화 등 3명은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나머지 23명은 6개월의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당시 징역형을 받은 주민 중 김시윤(당시 15세)과 한광용(당시 18세) 등 두 명은 10대의 어린나이였다.

도진리 마을입구 충효마을 비
고령 박씨 문중을 중심으로 한 만세운동은 마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다 2005년 국가자료원이 일제강점기 법원 재판기록을 전산 처리하는 과정에서 밝혀졌다.

박재필과 박채환, 박기로, 박영화 등 4명은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박영우와 박정열 등 고령 박씨 문중 참여자와 김경술과 강복이 등 마을 주민 참여자 19명에겐 대통령 표창이 수여됐다. 그러나 아직까지 김시윤과 도원섭 등 4명은 후손이 확인되지 않아 독립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3·1운동 당시 고령 박씨 문중이 중심이 돼 3일 동안 펼친 만세운동은 최근 새롭게 조명 받고 있다. 박씨 문중과 향토사학자들에 따르면 도진리 만세운동은 문중 차원의 3·1운동으로, 독립운동사에 보기 드문 사례로 평가받고 있는 것.

박영우의 후손인 박준열(87·도진리)씨는 “잊혀 질수 있는 조상들의 만세운동이 늦게나마 조명을 받아 다행”이라고 했다. 당시 마을 주민으로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정만도의 후손인 정화춘(78·도진리)씨도 “요즘에는 손자, 손녀들에게 증조할아버지의 항일운동을 자랑스럽게 얘기해 준다.”고 말했다.

고령 박씨 도진종친회는 조상들의 항일정신과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기 위해 ‘독립만세 기념비’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박돈헌(63) 추진위원회 총무는 “문중과 마을 주민들이 궐기한 기미년 만세운동은 나라와 민족을 위한 애국애족 정신에서 발로한 사건”이라며 “조상의 숭고한 나라사랑 정신을 받들고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애국정신을 심어주기 위한 교육의장을 만들기 위해 공원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그는 “도진리는 역사가 깊고 충신, 효자, 학자 등의 인물들이 배출 된 마을답게 여러 문화재가 많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 중에서 ‘남고정’이 있다. 남고정은 남고 박응형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뜻을 모아 도진리 마을 안쪽에 지었다.

문연서원 유허비
우곡면 도진리 마을에 들어가기 전 국도변 좌측에는 문연서원의 유허비와 5개의 비석을 볼 수 있다.

문연서원은 1695년에 박정번 선생의 학문을 후학에게 가르치는 으로 서원으로 건립했으며, 그 후 박윤,박택, 최여설 등 5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으로 이용되다가, 고종 때 서원은 철폐됐다. 현재 후손들이 유허비를 세워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다.

또 고령박씨(高靈朴氏) 소윤공파(小尹公派) 도진종중회는 마을역사를 집약한 책자 ‘도원록’을 2015년에 발간했다. 전국 최초이며 이 책은 국·공립 도서관에 배부됐다.

27년에 걸쳐 향사원고를 편집해 발간한 도원록은 우곡면 도진리를 세거지로 삼는 고령박씨의 숨결과 사상이 담겨진 문적과 유물 및 향사와 마을유래를 집약한 기록지다. 본문 400여 쪽 과 부록 60여 쪽으로 구성됐다. 부록에는 고문적·유적·유물 사진 등 다양한 자료를 실었다.

당시 박태규 도진종중회장은 “도원록은 우리가 고향의 역사를 잊어버리면 미래를 열지 못한다는 생각에 내게 됐다. 현조와 충효가 있는 이름난 분들의 행적을 기록한 문적을 책으로 엮었다”고 말했다.


독립유공자 박기로 비석
권오항 기자
권오항 기자 koh@kyongbuk.com

고령, 성주 담당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