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식 시인
천 원권의 인물 초상은 퇴계 이황이다. 부제로 명륜당과 매화를 넣었다. 명륜당은 유생을 교육시키던 성균관 안의 건물. 그는 수차례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했다. 요즘으로 치면 서울대 총장을 지냈다고나 할까.

매화는 퇴계가 애지중지한 나무이다. 심지어 임종하던 날에도 “매화에 물을 주라”고 당부했다. 봄소식 전하는 최고의 전령사는 매화가 아닌가 싶다. 깡마른 가지에 돋아난 새하얀 꽃잎을 보면서 자연의 순환을 느낀다. 종종걸음 시시각각 다가오는 미풍의 온기가 포근하다.

고려 시대 편찬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고대사의 유일한 역사서.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왕명으로 간행된 정사임에 비해 일연의 삼국유사는 승려 개인이 집필한 야사이다. 당연히 문장이 질박하고 수수하다.

삼국유사 제1권에는 5가야 얘기가 나온다. 아라가야(함안) 고령가야(함창) 대가야(고령) 성산가야(성주) 소가야(고성)를 나열하고, 고려 태조 때 이름을 고쳤다는 이설도 덧붙인다. 비화가야의 본거지가 창녕이라 밝히고, 여기에 가락국으로 분류한 금관가야를 포함시켜 6가야로 칭한다. 일연은 제2권에 별도로 가락국기를 서술했다.

가야사는 통일 신라의 위상과 임나일본부설이 작용해 소홀히 취급된 역사의 단면이다. ‘한국 고대 사국(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국경선’이란 학술서도 출간됐지만, 여전히 우리의 고대사는 삼국 시대로 평가한다. 가야는 비운의 멸망으로 승자에 의해 지워진 혹은 사라진 향기에 다름 아니다.

이십 대 시절이던 1970년대 후반으로 기억된다. 대가야 도읍지인 고령의 지산동 고분군 발굴 현장을 갔었다. 지역의 유지를 따라가서 둘러봤는데, 생전 처음 목격한 내부는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여기저기 순장의 잔해와 함께 토기가 혼재했다. 입시 때문에 암기했던 순장제의 야만성은 지금껏 잊히지 않는다.

대영박물관과 BBC가 펴낸 ‘100대 유물로 보는 세계사’란 책은 흥미진진하다. 탄자니아 해변에서 발견된 몇 개의 사금파리로 도시의 발전상과 무역로를 짚어가는 분석력에 놀랐다. 무작정 전개하는 과거의 추리가 아니라, 시적 상상력이 가미된 과학적인 논리는 공감을 일으켰다.

유일하게 ‘한국기와’도 소개됐다. 그것이 지구 반대편 대영박물관에 소장됐다는 사실이 놀랍다. 서기 700년경 통일 신라에서 제작된 토제 기와 하나로 문화사적 함의를 밝힌다. 이무깃돌처럼 저택의 지붕에 있었고, 거푸집의 대량 생산품이며, 이엉이 기와로 바뀐 주택 혁명이고, 비단길 끄트머리의 경주가 웅장한 집들이 필요한 이유, 당나라와 반역 세력의 정치 역학과 삼국 통일의 의미를 되짚는다.

여행은 날씨가 제일의 조건이다. 찬기가 살짝 묻은 빛살이긴 하나 나들이로는 제격이다. 고령은 주산 등성이를 따라서 이어진 봉분이 정겨운 고장. 나의 고향이기도 하다. 덕분에 가야라는 실체에 관심이 생겼다. 그 자취를 더듬고자 산청 함안 의령 창녕을 다녀왔다.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산청의 구형왕릉, 아라가야 지배층 무덤인 함안의 고분군, 의령박물관에 전시된 가야 토기, 그리고 비화가야 본거지인 창녕의 고분군을 살폈다.

신비의 왕국 가야의 고분이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추진된다. 후기 가야 연맹의 맹주국인 대가야 곽용환 고령군수의 주도적인 역할이 막중하다. 열정이 넘치기에 성공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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