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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산다는 것이 좀 허무하다는 건 모두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때로 취하면서 살기도 하는 게 인생입니다. 술에 취하고, 사랑에 취하고, 돈에 취하고, 종교에 취하고, 예술에 취하고, 권력에 취합니다. 취하는 게 결국 허무에 대적하는 한 방법이라는 거지요. 인간이 허무에 대적하는 방법 중 그래도 좀 건전한 것이 예술입니다. 제 개인사를 보더라도, 온갖 세상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용케 버틴 세월의 끝자락에서 하나 남은 게 예술입니다. 흔히 하는 말로, 마지막 남은 사랑도 가고, 다시 못 올 혁명도 가고, 구원을 약속했던 종교마저 떠난 뒤, 제 한 몸에 하나 남은 것이 예술입니다. 나이 들어 종교에 귀의하는 것도 아름답습니다만, 평생을 불경(不敬)과 신성모독으로 살아온 저 같은 자의 죄 값이 워낙 중하기에 그것을 짧은 기간에 다 물어내려면 체모(體貌)가 여간 상하는 게 아닙니다. 모든 걸 아낌없이 다 받쳐야 하고 시도 때도 없이 고개를 숙여야 하고 고비마다 속절없이 울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생각이 없으면 아예 신전에 들지 않는 것이 마땅하고 옳습니다. 나이 들어 ‘돌아온 탕자’들이 쉬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도 다 그런 까닭에서입니다. 그래서 결국 예술입니다. 예술이라고 해서 마냥 손쉬운 일은 아닙니다만, 인간으로 죽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거기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제게 예술이 처음 찾아온 것은 ‘막살고 싶다는 충동’이 억세게 밀려들었던 대학 시절이었습니다. 3학년 말 무렵이었습니다. 2학기 들어 합류한 제대 복학생 선배가 뜬금없이 이제하의 ‘유자약전’이라는 소설을 한 번 읽어보라고 권했습니다(평소 혈압이 높았던 그 선배는 작년 이맘때 아침 등산길에서 그만 세상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공부가 많이 될 거라고 했습니다. ’유자약전’은 제가 즐겨 읽던 소설, 이청준이나 황석영 들과는 좀 달랐습니다. 소년 시절 또래보다 두어 살 나이가 많았던 친구를 따라 학교 뒤 주막집에 처음 들어갔을 때의 그 ‘쓸쓸하고 찬란한’ 느낌이었다고나 할까요? 과수댁 주인장이 까까머리 손님들을 깍듯이 맞이하던 골목길 안마당을 그 소설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아마 그 선배는 제게 무언가를 가르쳐주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술에 취하지도 못하고, 자기밖에 모르고, 주위를 온통 우습게만 여기던 청맹과니에게 ‘취하는 것의 슬픔’을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소설을 읽는 동안 내내 몹시 힘이 쓰였습니다. 줄거리를 따라가는 게 괴롭기만 했습니다. 아직 어리고 미숙했던 제 상상력은 ‘삶의 비극적인 요소들에 대한 포괄적인 추인(追認)’에 대해 쉽게 동의하지 못했습니다. 묘사가 관념(주제)을 무시하는 것도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어쨌든 약간의 아노미가 스쳐 지나간 뒤에 제 예술 인생에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예술이라면 ‘삶의 민낯’과 야멸차게 대면해야 한다는 것, 그러면서도 ‘취하는 것의 슬픔’에 몰두해야 한다는 것을 그때 배웠습니다. 그 이전에 읽었던 것들이 ‘책’이었다면 그때 읽은 ‘유자약전’은 ‘노래’였습니다. 도대체 내게 예술이란 무엇인가라고, 정면에서 스스로를 다그친 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한 잡지에서 가수 장사익에 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25년 동안 14번의 직장을 옮겨 다니다가 어느 날 문득 만난 것이 예술이었습니다. 그가 처음 예술 세계로 들어온 문은 태평소였습니다. 카센터에서 일하면서 태평소를 배워 아마추어 연주자로 활약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스승 앞에서 노래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넌 왜, 박자를 맞추면서 노래를 하냐?”라는 한 말씀을 듣게 됩니다. ‘남이 정해놓은 틀 하나 못 깨면서 무슨 예술을 하겠다는 거냐’라는 꾸지람이었습니다. 그 한 말씀에 가객 장사익이 탄생합니다. 비로소 본격적으로 ‘취하는 것의 슬픔’에 동참하게 됩니다. 대기만성(大器晩成), 그의 나이 45세 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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