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선정은 신선이 노니는 정자라는 뜻이다.
거창 북상면 갈계리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산자수명한 마을이다. 서쪽으로는 제1덕유산의 고봉이, 남쪽으로는 월여산봉과 금원산이, 동쪽으로는 호음산과 시루봉,북쪽으로는 제2덕유산과 못봉이 병풍처럼 둘러쳐 마을을 포근히 안고 있다.

갈계리 은진 임씨의 입향조는 임천년(林千年)이다. 의령현감으로 있던 임천년은 세종이 승하하자 더 이상 벼슬자리에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산 높고 물 좋은 곳을 찾다가 갈계리를 퇴후지지로 잡았다. 칡넝쿨이 냇물처럼 바다처럼 넓게 퍼져 치내마을이라고도 하는데 산천이 아름답고 수석이 고운데다 마을 앞의 산에는 상어와 같이 생긴 큰 바위가 우뚝해 자손만대 계승할 만한 곳이라 믿었다. 이후 갈계리는 은진 임씨의 세거지로 이어져 오고 있다.
▲ 가선정은 갈천 임훈을 기려 지은 정자다

갈계리에 있는 갈계숲은 거창군 천연보호림이다. 수령 200~300년 된 소나무 물오리나무 느티나무 느릅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숲머리에서 물이 동서로 갈라져 흐르기 때문에 갈계숲은 자연스럽게 섬이 됐다. 숲안에 가선정이 있어 가선림이라고도 하고 치내마을의 숲, 치내숲이라고도 한다. 또 소정천을 가로지르는 청학교가 놓인 뒤로는 청학숲이라고도 부른다. 갈계숲을 섬으로 만들며 흐르는 물은 갈천이다. 덕유산에서 발원한 물이 송계사계곡과 소정천을 이루며 흐르는 그 냇물이다.

갈계숲은 은진 임씨 명사들의 별장이다. 임씨 문중의 정자가 3개나 들어서 있다. 본래 주인은 명종 때 6현신(六賢臣)의 한 사람인 갈천(葛川) 임훈(林薰 1500~1584)이다. 갈계숲, 갈계리,갈천이 모두 그의 호에서 비롯됐다. 임훈은 갈계리 입향조인 임천년의 증손이다.1540년(중종 35)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독서했다. 효행이 뛰어나 1566년 관찰사의 추천으로 효행의 정려를 받은 뒤 그해 언양현감에 발탁됐다. 장악원정을 거쳐 광주목사를 지냈다. 용문서원(龍門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갈천집』이 있다. 선조가 그를 아꼈다. 임훈이 비안현감으로 있을 때 편전으로 불러들여 치국의 도를 묻기도 했다. 퇴직 후 고향에서 병으로 힘들어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음식과 미곡을 하사했으며 병이 중해지자 의원을 보냈지만 임훈은 이미 타계했다. 선조는 부의를 내리고 이조판서에 추증하는 한편 그의 효행을 높이 사 효간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임훈이 이름을 날린 일은 퇴계 이황과 시문을 주고 받은 수승대 개명건이다. 1543년 이황이 장인 권질을 찾아 인근의 마리면 영승까지 왔다가 왕명을 받고 한양으로 돌아가면서 꼭 보리라던 수승대를 보지 못했다. 수승대에 ‘지분’이 있던 신권과 임훈도 만나지 못했다. 그때 ‘수송대’를 ‘수승대’로 바꾸면 어떻겠느냐며 시를 썼다. 수승대에 정자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던 신권과 신권의 처남이었던 임훈이 그에 답하는 시를 각각 썼다. 신권은 감사의 뜻을, 임훈은 퇴계에게 ‘그대도 지나가는 과객일 뿐’이라는 투로 비틀었다. 그후 수송대는 수승대로 개명됐다.수승대 거북바위에는 퇴계의 시와 임훈의 시가 나란히 각자돼 있다.

갈계숲에 있는 가선정은 임훈의 덕망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정자다. 임훈의 『갈천집』에 실린 시(‘가선정 수연 자리에서 양 거창의 운을 따라 짓다’)의 내용으로 보아 본래 임훈이 생존해있던 당시에 가선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정자는 1936년 후손들이 세웠다. 가선정은 ‘신선이 노니는 정자’라는 뜻이다. 후손 임필희가 쓴 해서처 편액이 단아하다. 정자는 정면, 측면 각 두 칸이며 2층 누각에 계자난간을 설치했다. 처마끝 네 귀퉁이에 활주를 두었고 네 기둥에 7언절구 주련을 걸었다. 정자로 오르는 계단을 마루 밑에 두어 누마루 바닥을 밀치고 오르도록 해 공간활용을 잘 했다. 천장 들보에는 용무늬를 그렸고 신선의 풍모를 느끼게 하는 그림을 그려 개성 넘치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정자 안에는 임훈의 ‘가선정운’과 밀성 박봉기, 월성 김동준 등의 시가 걸려있으나 기문이 없다.

도계정은 도계 임영을 기려 지은 정자다.


한 줄기가 천 그루의 만 가지 되어

봄바람, 좋은 비에 가만히 날로 불어났네

사람이 나서 어쩌면 저렇게 오래 살 수 있나

해마다 오래 보살피고 때로 길이 길렀기 때문이지

- 임훈의 시 ‘가선정운’



임훈 임영의 부친은 임득번이다. 분, 훈, 영, 부동,운 등 5형제를 낳았는데 부동과 운은 일찍 죽고 삼형제가 남았다. 살아남은 3형제는 모두 학식과 효행이 뛰어나 마을의 자랑이었다. 마을 서쪽의 윤덕봉은 봉우리가 셋인데 이들 삼형제의 호를 따 갈천, 도계, 첨모당의 봉우리라고 했다. 도계(道溪)임영(林英)은 형 임훈, 동생 임예와 함께 마학동에서 강학을 했는데 해동의 안자라 할 정도로 학식이 뛰어났으나 31세 요절했다. 막내 동생 첨모당 예는 퇴계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도산서원에서 수학했다. 대제학을 거쳐 가선대부를 지냈고 용문서원에 배향됐다.

도계정(道溪亭)은 도계 임영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1935년 건립했다. 정면 세 칸 측면 두칸에 계자난간을 두르고 네 모퉁이에 활주를 달았다. 2층 다락집 형태로 지었다. 정면 3칸·측면 2칸의 누각 건물이며 가운데 칸에 방을 들이고 계자난간을 둘렀다. 정자 안에는 가선대부 완산 이명상이 지은 ‘도계정기’와 이순하가 쓴 ‘도계정 상량문’그리고 후손들이 쓴 시판이 있다. 이순하는 상량문에서 “모든 성인이 우러러 높은 학문과 구부려 서책의 떳떳한 가르침을 거느릴 수 있었도다. 또한 형님과 아우의 덕 있는 소리에 방법이 있었으니 서로 공경함을 좋아하였음이라, 소씨 가문의 형제가 있는데 셋째가 유학에 뛰어나 남의 재주보다 월등하였고, 안자의 거리가 창이 비어 있다가 갑자기 요절하는 불행을 당하였다. 반드시 이름을 얻었으며 반드시 목숨도 얻었어야 하는데 어찌 30에 그치고 요절이라 하는가? 그 뜻을 보고 그 행실을 보면 만에 하나라도 아름다움을 제대로 드러낸 것이 없는 것이 한이다”라고 뛰어나 재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위해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일찍 죽은 안타까움을 표했다.



도계정에서 갈계 동천을 마주하니

주렴 밖 구름 산은 그림을 펼친 듯 하고

올라 보니 뛰어난 경치 알고도 남겠고

풍류가 아직 있어 옛 현인이 생각난다

날 길고 무료하여 거문고와 책을 보내니

꽃과 대에 봄이 깊어 주변을 시로 읊조린다

다만 뜻이어 지으니 정자가 항상 좋아

마땅히 백세에 아름다운 일 전하리라

-서상훈의 시 ‘삼가 도계정 운을 차운하여’

병암정은 병암 임여남을 추모해지은 정자다


병암정은 임훈 임영 임예 삼형제 중 막내 임예의 증손인 병암(屛巖) 임여남(林汝枏)을 기려 지은 정자다. 임여남은 일찍이 자연에 뜻을 두고 마을 서쪽 시냇가에 있는 병풍같이 둘러처진 아름다운 바위에 병암이라 이름하고 노닐다가 자신의 호도 병암으로 지었다. 임여남이 죽자 그 유허지에 후손들이 병암정사를 짓고 선비들과 강학하고 시문을 읊었으나 1868년에 불이나 타 없어졌다. 오랜 공론 끝에 1909년 갈계숲에 ‘병암정’이라 이름하고 중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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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완 자유기고가
병암정은 육모정이다. 정면한 칸 측면 한 칸의 소박한 정자다. 도계정이 남성적인 풍모라면 병암정은 여성적인 날렵한 몸매를 가졌다. 2층 누각에 네 귀에 활주를 달았고 네 기둥에 주련을 걸었다. 정자 천정 가운데 화려한 채색의 단청이 눈길을 끈다. 영남누각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로 꼽힌다. 정자 안에는 임기홍이 지은 ‘병암정 중건기’와 판상시,임만희의 칠언절구 등이 걸려있다. “아, 병(屛)이란 막아서 가린다는 뜻이요, 암(巖)이란 영원히 보존하는 바탕이라, 내 뒤를 후손들에게 권면하여 걱정거리를 방비하기를 병품을 둘러막는 것처럼 하고 간직하고 지키기를 바위의 견고함과 같이 한다면 정자도 과연을 이름에 배척되지 않을 것이다” 임기홍은 이렇게 정기를 썼다.
도계정 현판
병암정 현판
가선정에서 바라보 도계정
병암정에서 바라본 갈계숲
병암정은 소박하지만 내부의 화려한 단청이 눈길을 끌고 있다.
도계정에서 본 가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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