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곽성일 행정사회부 부국장
1979년 궁정동에서 느닷없이 울려 퍼진 몇 발의 총탄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절대권력’이 생을 마감했다.

그로부터 38년이 흐른 2017년 3월 10일 오전, 헌법재판소에서 ‘탄핵 인용’이라는 ‘소리 없는 총성’으로 ‘또 하나의 절대권력’이 숨을 멈췄다.

궁정동 총성이 부패한 권력의 ‘내부자의 저항’이었다면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은 무능과 무원칙으로 일관한 절대권력의 수레바퀴를 멈추게 한 ‘시민의 힘’이었다.

‘조국 근대화의 우상’, ‘유신독재의 상징’은 총탄에 쓰러져 갔고, 시민의 ‘비폭력 아우성’에 무능한 절대권력은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렇게 ‘아버지와 딸’은 대한민국의 ‘부끄럽고 슬픈 역사’가 됐다.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하고 끝내 ‘비참한 종말’을 고했다.

아버지의 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리라는 국민의 염원은 탄핵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그 한계를 미처 깨닫지 못한 국민의 선택에 흠결이 갔다.

‘절대권력의 몰락’은 결코 ‘유토피아’를 약속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몰락’은 국민의 민주화 염원을 저버린 ‘제5공화국 탄생’이라는 의도하지 않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면 ‘딸의 몰락’은 과연 무엇을 가져다줄까.

겨울을 질주하던 ‘탄핵열차’는 ‘차기 대선’으로 또다시 달려가기 시작했다.

성공한 사람의 발목을 잡는 가장 큰 적은 짜릿한 ‘성공 기억’이다. 그 성공기억에 사로잡혀 새로운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게 된다.

노자는 말한다. “공이 이루어지면, 그 공을 차고앉지 말아야 한다 (功成而不居)” 공을 차고앉았다는 말은 바로 성공 기억에 갇혔다는 뜻이다.

탄핵을 성사시킨 ‘시민의 힘’과 그 역동성에 불안한 시선을 보내는 ‘또 다른 시민의 힘’은 과연 ‘대한민국’이리는 이름으로 하나가 될 수 있을까.

개헌을 성사하지 못하면 국민은 5월에 또다시 ‘절대 권력’을 선택해야 한다.

어느 절대권력 후보는 ‘분노는 성장의 추동력’이라는 강한 소신을 갖고 있다. 그 분노가 부패한 권력을 청소하고 새로운 희망의 권력이 될지는 누구도 장담 못 한다

어느 정부이든 그 출발은 ‘선의’이다. 문제는 그 선의가 국민이 아닌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기 때문에 환영을 받지 못한다.

마침내 집단 반발이라는 거대한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절대권력이 사라진 봄날, 우리는 과연 우리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을까 하는 커다란 숙제를 안게 됐다.

탄핵으로 몰아간 분노가 ‘또 다른 분노’를 생산하는 슬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아야 하는 역사의 전환점에 서 있다.

‘건국 이후 잘못 꿰어진 단추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세력은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잘못된 시작을 청산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 주장들이 70년대가 아닌 지금에도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까는 ‘국민의 합의’가 필요한 중요한 ‘시대적 담론’이다.

이제는 ‘국민 대통합 차원’에서 ‘촛불’과 ‘태극기’를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해 ‘대한민국호’에 희망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는 북한 핵으로 인한 미국과 중국, 일본 등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신음하고 있다. 내분으로 인한 내상이 깊어져 ‘외부의 적’들에게 우리를 지키지 못할까 걱정이다.

탄핵으로 치러질 벚꽃 대선은 ‘또 다른 분노’를 생산하지 않고 긴박한 동북아질서에 대처하며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도약할 능력을 갖춘 ‘위대한 리더십’이 탄생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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