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환 전 의성공고 교장.jpg
▲ 조수환 전 의성공고 교장
광복(1945년) 전후의 이야기이다.

겨울철 동지·설 전후의 시기는 농한기이지만 또 다른 농사 준비 일이 있다. 이른 새벽 먼동이 터서 길바닥이 겨우 보이기 시작하면 부지런한 농부는 개똥을 주우러 나간다. 길바닥에 붙어 있는 쇠똥이나 개똥을 주워 개똥 소쿠리에 끌어 담아 온다. 늦게 나가면 다른 사람이 먼저 주어 가버리면 허탕이다.

개똥 소쿠리는 볏짚을 엮어 만든 짚소쿠리이고 위와 옆이 트여있고 벗짚끈이 있어 능청 하게 어깨에 메고 골목길을 다니며 개똥을 발견하면 개똥 소쿠리의 트여있는 면을 땅바닥에 대고 개똥 호미로 긁어 개똥 소쿠리에 담는다. “개똥망태기”라고도 한다. 개똥은 농사 거름으로 요긴하게 쓰이니 아주 소중한 것이었다. 비료가 귀하니 퇴비가 더없이 소중하던 시대였다.

그 시절 농가에는 대부분이 한 집에 개를 한두 마리씩은 길렀다. 요즈음 같은 작은 개는 없고 덩치가 큰 식용개다. 목줄 없이 방사하니 온 동네를 마구 나다니며 이웃집 개와 어울려 놀다가 주인이 ‘워~리’라고 부르면 잘 알아듣고 헐레벌떡 꼬리를 흔들며 집으로 재빨리 뛰어온다. 주로 애기가 방바닥에 눈 똥을 개에게 먹인다. 방바닥에 묻은 애기똥을 맛있게 삭삭 핥아 먹는다. 애기 똥 처리가 아주 쉬워진다. 그래서 똥개라고 한다. 동네 길에는 개똥이 많고 큰 주먹만 한 것이니 줍기가 쉽다.

길바닥을 샅샅이 살펴나가다가 개똥을 만나면 횡재를 했는 양 아주 반갑다. 개똥을 많이 주워서 묵직하게 된 개똥망태를 메고 집에 들어올 때는 기분이 퍽 좋다. 물렁물렁한 쇠똥은 새벽 영하의 기온에 얼어서 길바닥에 넓적하게 붙어 있다. 큼직하니 더욱 반갑다. 언 것은 주워담기도 편하다. 주어 온 개똥은 볏짚 거름에 섞어 같이 썩힌다. 그 시절에는 볏짚과 생초 인분 등도 모두 농사용 거름이다.

필자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인 일제 강점기 말엽, 겨울철에는 쇠똥을 주워 학교에 가져다 내어야 했다. 온 골목에서 부지런히 주워 모은 쇠똥을 볏짚 가마니에 담아 10여 리나 되는 학교에 짊어지고 가서 바쳐야 했다. 학교에서는 그 어린것들이 주워온 쇠똥의 무게를 달아 기록하여 평가한다. 이렇게 겨울철에 모은 쇠똥무더기가 작은 초가집채 만큼이나 쌓인다. 여름철에는 들풀도 베어다 새끼줄로 묶어서 등굣길에 짊어지고 가서 낸다. 여학생들도 머리에 이고 학교에 간다.

세계대전 말엽 일본이 크게 어려워진 시기라서 식량 증산을 한다고 학교 운동장 구석구석을 갈아서 밭을 만들었다. 호박, 양배추, 가지, 오이, 무, 배추 토마토 등 각가지 작물을 재배했다. 어린 학생들이 모아 만든 생초와 쇠똥 거름으로 가꾼 덕분에 싱싱하게 잘 자라서 제법 많은 수확을 했다.

그런 겨울에는 내복도 변변치 않은 상태에서 손발마저 시려서 그 고통은 너무나도 컸다. 교실에는 어린이들이 직접 학교 근처의 산에서 주워 모은 솔방울 연료 난로 하나가 난방 전부이다. 한 학급 어린이가 60여 명이고 홑으로 된 유리 창문은 단열이 거의 안 돼 찬바람이 자꾸만 들어온다. 경제 대국으로 발전한 현재의 우리 젊은이들은 상상마저도 할 수 없는 지난 시절의 이야기이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