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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한 시대가 흘러갔습니다. 앞으로 많은 것들이 바뀔 것 같다는 예감이 듭니다. 의식이 바뀌고, 사람이 교체되고, 제도가 정비되면서, 전에 없던 새 에너지의 충전이 급속하게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 역사는 종종 ‘마디’ 적 전개, 계단식 전개를 보여줍니다. 한동안 정체된 모습을 보이다가 일순 막힌 곳이 뚫리면서 격하게 앞으로 달려나갑니다. 격랑(激浪)이 한꺼번에 적폐(積弊)를 휩쓸고 지나갑니다. 누군가 말했습니다. “혁명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요. 미래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자들에 의해서 역사는 앞으로 나아갑니다. 괄목할 만한 역사의 진보를 평화적으로, 이성적으로, 당당하게 이루어내는 우리 민족의 저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공연히 감사합니다.

아시다시피, ‘시대’라는 시간 개념을 (강물처럼) ‘흘러갔다’라고 공간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비유입니다. ‘한 시대가 흘러갔다’라는 말은 당연히 은유입니다만 자주 그런 표현을 쓰다 보면 그것이 비유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른바 ‘죽은 은유(dead metaphor)’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면, 시간 개념이란 것 그 자체가 이미 비유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시간’을 ‘공간’과 대비시키는 것을 좋아합니다만 사실은 시간 자체가 ‘준-공간성’으로만 존재합니다. 우리가 아주 자연스럽게 ‘시간이 흘러간다’, ‘시간이 지나갔다’라는 말을 쓴다는 게 그 증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비유적 표현의 필연성을 인정한다면, 흘러간다는 것은 곧 미래에서 현재를 거쳐 과거로 가는 것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시간은 미래로부터 온다는 것이지요. 과거로부터 오는 것은 시간이 아닙니다. 망상이나 망집입니다.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반복적 시간’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미래로부터 오는 시간은 그것의 ‘준-공간성’ 때문이라도 미래적 상황(인간과 사건)을 동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간의 측정이 반드시 ‘어떤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며, 시간적 간격 사이의 모든 관계는 ‘시간적 공간’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공간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측정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우리에게 오는 미래는 항상 구체적인 계시의 형태를 띱니다. ‘폴 리쾨르(김한식, 이경래), ‘시간과 이야기’’

혹시 어렵다고 하실 분이 있을 것 같아서 영화 ‘터미네이터’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영화의 기본 줄거리는 미래의 ‘인간과 기계의 결전’이 과거로 전장(戰場)을 이동해 전개된다는 것입니다. 거대한 컴퓨터인 지구방위 시스템(인공지능)은 지구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인류를 멸종시키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핵전쟁을 유발시킵니다. 그러나 미래로부터 온 계시를 접수한 한 여성(미래 인류군 사령관의 어머니)의 힘에 의해서 그 인류 박멸 작전은 실패로 돌아갈 위기에 처합니다. 그래서 인공지능이 생각해 낸 것이 터미네이터(해결사 로봇)를 과거로 보내 그 여성을 죽이는 것입니다. 애초에 씨부터 말리겠다는 것이지요. 그것을 안 인류군 사령관도 전사 한 명을 선발해 과거로 보냅니다. 자신의 어머니를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리지요. 그 용감한 전사가 바로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그는 압니다. 인공지능도 자신의 씨(터미네이터)를 과거로 보내고(그 잔해를 토대로 과학자들은 인공지능을 만듭니다), 아들도 아버지를 과거로 보냅니다. 시간은 미래로부터 와서 과거로 흘러갑니다.

시대적 전환기를 맞이해서 우리가 할 일은 딱 하나입니다. 우리 곁에 와 있는 미래가 누구인가, 눈에 불을 켜고, 그것을 알아내야 합니다. 혹시 내 안에 있을지도 모르는 과거의 손길을 과감히 뿌리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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