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뜻이 맞지 못해 떠나는 것이 어찌 내가 바라던 바였겠느냐? 나는 마지못해 떠나는 것이다. 사흘을 묵고 주 땅을 떠났으나, 내 마음에는 오히려 빨랐다고 생각한다. 임금이 마음을 고치기를 바랐었다... 제나라 임금은 그래도 착한 정치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왕이 만일 나를 써 준다면 어찌 제나라 백성만을 편안하게 되겠는가? 천하의 백성이 다 편안하게 될 것이다. 내 어찌 소장부(小丈夫)같이 굴겠는가? 임금에게 간(諫)하였다가 받아주지 않는다고 곧 노하여 발끈한 빛을 그 얼굴에 나타내고 떠나면서, 종일토록 힘껏 간 후에 묵는 것처럼 하겠는가?”
윤사가 이를 전해 듣고 나는 진실로 소인(小人)이로다 했다고 한다.
이 글은 정치와 관계되는 내용이지만, 사람에게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랑의 마음은 절교와 절연에 있어서도 응용된다. 혹시라도 마음이 돌아오지 않을까 하고 기다리는 마음. 옛사람의 사람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을 엿볼 수 있다. 이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이 왕도정치의 마음이다. 자기 부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을 옮겨 다른 사람의 부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을 쓰며, 자기 아들딸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을 옮겨 다른 사람의 아들딸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을 적용한다면 세상은 참으로 평화롭고 사랑에 넘칠 것이다.
증자는 임종을 신중히 하고 먼 조상을 추모하면 백성의 덕이 순후해질 것이라(愼終追遠 民德歸厚)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먼 조상에게까지 추모하는 마음을 낼 수 있다면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오죽하겠느냐는 말이겠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어진 사람이 사는 고장이오 군자의 나라라고 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서로 사양하고 권하는 예양(禮讓)의 땅이었다. 그래서 중국인에게도 경모의 대상이었음은 예기나 후한서 등 여러 기록에 실려 있다.
헌재판결 이후 결과의 승복을 강요하고 있다. 승복하였으므로 청와대를 나와 삼성동에 갔으리라. 그러나 마음으로 승복한 것은 아닌 모양새다. 제갈공명은 남만의 맹획을 일곱 번 사로잡고 일곱 번 놓아주는 칠종칠금 이후에야 비로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항복을 받았다. 이후 남만은 촉한이 중원을 칠 때 항상 군대를 내어 도왔다. 마음의 복종은 참으로 얻기 어렵다. 승복하지 않는다고 비난하지만 말고 왜 승복하지 않을까 배려해 보는 자세도 필요한 시점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