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꺼운 책갈피에 백일홍 꽃잎을 끼워 넣으면서
그 여름이 지나갔다

무대는 침묵으로 가득하다
서로의 시선을 비켜서 의자가 등을 보이며 돌아앉아 있고
어떤 대사도 없이 한 사람이 올라가고 한 사람이 내려오고
여러 사람이 무심한 듯 시소 위에 올라앉아 있다

바람과 구름의 입술이 스쳐 간 자작나무 잎사귀에는
비비새가 쪼아대던 새벽의 공기가 묻어 있고
무대는 의자와 시소와 침묵으로 꽉 차 있다

나는 막 이불을 펼치려던 참이었고, 나는 막 창문을 잠그려던 참이었는데

첫눈 같은 이마를 반짝이며 가을이 오고 있었다

(하략)




감상) 몇 해 전인지도 모를 그 때 그 시집을 샀나보다. 그 때가 가을이었나 보다. 코스모스가 핀 길을 걸었던가 보다. 그 시집엔 그 날의 코스모스가 예쁘게 말라 있었고 하얀 종이엔 꽃보다 더 예쁜 화인이 찍혀 있었다. 언제였는지 누구와 함께였는지는 남지 않고 코스모스만 남은 그 날. 그 날 나는 나에게 무엇을 남기고 싶었던 것일까.(시인 최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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