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선비들의 무릉도원…함양군 안의면은 현대인의 '먹방순례지'

▲ 광풍루는 일두 정여창이 안의현감으로 있을 당시 중수하고 이름을 새로 지었다.
현대인에게 함양군 안의면은 그저 한번은 가봐야 할 ‘먹방순례지’다. 그 이름도 유명한 갈비탕과 갈비찜 덕이다.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TV 음식프로그램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앞다투어 이곳의 갈비탕과 갈비찜을 소개한 끝에 정작 함양군보다 안의면이 더 알려지거나 함양과 안의를 별개의 지역으로 여기는 이름값의 역전현상이 벌어졌다.

안의가 현대인의 먹방순례지로 이름을 떨친 것과는 달리 조선시대의 안의는 선비들의 무릉도원이었다.

기백산(880m)·황석산(1,100m)·월봉산(1,292m)·망운봉(619m) 등의 높은 산지에 둘러싸고 있으며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지우천이 남계천과 합류하면서 분지가 생겼으니 안의다.

금호천 건너편에서 본 광풍류
정여창과 연암 박지원이 안의현감을 지냈고 국민관광지로 지정된 농월정이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안의를 선비들의 무릉도원으로 부르는 이유는 화림동과 심진동, 원학동 등 ‘안의삼동(安義三洞)’이 있기 때문이다. 1914년 행정개편이 이뤄지면서 안의삼동 중 원학동은 거창군 위천면으로 떨어져 나갔다. 화림동계곡에는 농월정과 거연정 동호정이 들어섰고 심진동에는 심원정이 자리잡았다. 거창 위천면에는 수승대가 있다. 선비들은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취해 탁족을 즐기는가 하면 시회를 열거나 술을 마시며 자연의 정취를 흠뻑 즐겼다. 선비들의 죽기 전에 가보고 싶은 곳, 여행 버킷리스트에 단연 꼽히는 곳이었다. 좌안동 우함양의 영남사림을 대표하는 곳이었으므로 더욱 그러했다.

광풍루 정면 편액.광풍루의 광풍은 비 개인 날 맑게 부는 바람이라는 뜻이다
금호천은 남강이라고도 한다. 남덕유산 참샘에서 발원하여 화림동 계곡을 지나와 광풍루 앞에서 남계천이라 불리기도 하고 금호천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임천, 덕천강과 합류한 뒤 진주에서 잠시 북동쪽으로 물길을 바꾸어 의령군 기강나루로 향하다가 함안군 대산면 장포에서 낙동강과 합류한다. 광풍루는 화림동 계곡이 끝나고 남계천이 큰 내를 이뤄 흐르는 금호천변에 있다. 안의버스종합터미널과 안의면사무소 그리고 안의갈비탕 식당이 줄지어 들어선 안의면 소재지에 있다. 갈비탕 먹방 순례지의 현장에 있다.

1412년(태종 12) 이안 현감 전우(全遇)가 지었다. 그 당시에는 선화루(宣化樓)라고 했다. 1425년(세종7)에 김홍의가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가 1494년(성종 25)안의현감으로 부임했던 일두 정여창(鄭汝昌·1450~1504)이 중수하여 광풍루로 고쳤다. 정유재란 때 불에 탔으나 현감 장세남이 중건했다.

광풍루 안에서 본 금호천
동방오현의 한사람인 정여창은 광풍루를 세울 당시 인근의 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제월당(霽月堂)도 함께 세웠다. 광풍이라는 현판이 있는 누정에는 제월이라는 현판을 건 누정이 있게 마련이다. 광풍과 제월은 커플이거나 세트메뉴, 또는 패키지다. 담양 소쇄원에 있는 광풍각과 제월당이 그렇고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 있는 광풍정과 제월대가 그렇다. 함양의 경우 두 건물은 조금 떨어져 있다.

‘광풍제월’은 송나라 황정견이 북송대의 성리학자 주돈이의 인물됨을 가리켜 ‘가슴에 품은 뜻의 맑고 밝음은 마치 비 갠 날 청량하게 부는 바람과 같고 비 갠 하늘의 상쾌한 달과 같다’라고 말한 데서 비롯됐다. ‘광풍’은 비 갠 날 청량하게 부는 바람이라는 뜻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광풍루기’다. 송시열은 담양 소쇄원의 ‘광풍각’과 ‘제월당’의 현판을 쓰기도 했다. 당시는 현감 장세남이 송시열에게 기문을 부탁했는데 소쇄원의 광풍각 제월당의 현판 글씨를 염두에 두고 부탁했는지, 아니면 광풍루의 기문을 본 소쇄원쪽에서 현판글씨를 요청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일의 전후가 어떻든 간에 ‘광풍제월’에 관한한 송시열의 ‘라이센스’를 인정해줘야겠다고 속으로 웃었다.

송시열은 기문에서 “금년 봄 안음현감 장세남이 편지를 보내와 이르기를 ‘고을에 광풍루와 제월당이 있는데 이것은 일두선생께서 건축한 것입니다. 이 두 집이 세월이 오래되어 기둥을 버텨야 할 형편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런데 당은 상서 박장원이 이미 수리를 했으나 누는 지금에야 겨우 재력을 모아 고치는 중입니다. 이것은 선현의 유적이니 어찌 기문해서 꾸미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면서 장세남의 요청에 의해 기문을 쓰게 됐다고 밝혔다.



광풍루에서 강건너편에 있는 사적비
삼동의 이름난 승지 별천지에
일루의 풍월 넓어 끝이 없네
막막한 밭사이 백로는 날고
물흐르는 돌 위에 맑은 물 쏟아지네
서원의 대숲에 성근 비 좋을시고
동령의 산아지랭이 저녁 연기에 젖었네
두옹(정여창)이 가신 후 내가 이제 왔노라
이 즐거움 쓸쓸하게 지낸 지 200년이로세

- 안의현감 장세남의 시

광풍루앞 금호천변의 오리숲
송시열은 또 “아! 선생(정여창을 이름)은 ‘염락’을 소구해서 ‘수사’를 통달한 분이신데 대저 광풍제월이라 함은 ‘황로직’이 ‘무극옹’의 기상을 형용한 것이다. (중략) 광풍루 북쪽에 또 점풍대 옛터가 있고 대 아래에는 ‘욕기암’이 있으니 경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능히 그 이름에 따라서 실제를 구한다면 참으로 염락으로 말미암아 수사에 이를 것이니라”라고 후학들에게 당부의 말을 썼다.

▲ 글 사진 /김동완 자유기고가
염락은 주돈이가 살던 염계와 그의 제자 정호 정이가 강학하던 낙양을 말한다. 사수는 공자가 강학하던 곳이다. 성리학을 열심히 공부해서 공자 철학까지 통달하는 경지를 말하고 있다. 욕기암의 욕기는 기수에서 목욕한다는 뜻으로, 명리를 잊고 유유자적함을 이르는 말이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각자가 가진 뜻을 말해 보라고 하자, 증석이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 올라가 바람을 쐬고 노래하며 돌아오겠다고 대답한 고사에서 유래한다. 조선시대 정자 현판에서 무우 욕기 풍영등의 단어들이 자주 차용됐다. 황로직은 황정견을, 무극옹은 주돈이의 호이다.

광풍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이층 누각이다. 5량 구조 팔작지붕 겹치마 목조와가인데 누각으로 오르는 계단은 오른쪽 뒤쪽 측면에 설치했다. 누 아래에서 마루로 통하도록 통로를 파고 난간을 둘렀다. 누각 정면에 서면 금호천이 한눈에 들어오고 천 건너편의 오리숲도 보인다. 오른쪽으로는 안의면 종합버스터미널 등 시가지가 정겹게 펼쳐진다. 누각 내부는 단청을 깨끗하게 했으나 오래된 누각에서 느끼는 고졸미가 없다. 박장순과 이상학 등의 기문이 걸려 있고 시판은 없다.

영외(嶺外)의 선구(仙區)는 우리 안음이로다
광풍 산수는 맑고도 깊도다
용문의 흰 돌에 밝은 달 비쳐있고
골무산의 붉은 단풍 푸른 잎 반이로다
영지는 봄이 길게 있고
향기로운 주방에서는 반순 날마다 삶는다
등임(登臨)해보니 끼친 자취도 많구나
늙어서 물러나는 그 해에 또한 시를 읊으셨다.


광풍루는 지난해 1억3천만 원을 들여 꽃단장을 했다. 단청을 새롭게 입히고, 아울러 차량진입 등으로 인한 훼손을 막기 위해 광풍루 주변에 석축을 두르고, 잔디도 심었다. 이에 앞서 군은 도로에 인접한 광풍루가 차가 지날 때마다 흔들림 현상이 생기자 2013년 5억8천만 원을 들여 건물을 10m 뒤로 물려 보존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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