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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호 호서대교수 법학박사
프랑스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가 일본을 여행하고 쓴 ‘기호의 제국’에서 ‘덴푸라(天婦羅)’에 얽힌 사연을 소개했다. 덴푸라는 에도(江戶) 시대 일본에 들어온 포르투갈 선원들이 사순절에 생선을 튀겨 먹은 데서 유래한 음식이다. 당시 튀김을 몰랐던 일본인들이 라틴어의 ‘사순절 템포라(quatour tempora)’를 일본어 덴푸라로 불렀다. 이후 덴푸라는 줄곧 일본음식 튀김으로 통용되었다.

대선을 앞두고 예비주자마다 국민주권을 외치고 있다. 주권은 서양 정치학이 가르쳐준 개념이다. 그러나 저마다 국민주권의 개념을 덴푸라처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원래 사회계약이 성립하면서 주권개념이 등장하였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 가운데 누구에게나 공통되는 것을 기준으로 주권개념이 형성됐다. 주권은 국민 전체의 의사(General will)를 의미한다. 그런고로 정치인 개인의 의사가 전체의 의사를 대표할 수는 없다. 그 역도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모두의 이해가 서로 일치하는 복지나 안보 같은 공동의 선(善)이 없다면 주권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현재 대선 예비주자들의 주장을 살펴보면 어느 누구도 국민주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서양 민주주의가 가르쳐준 주권을 덴푸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공동의 선을 기반으로 대한민국을 이끌 후보는 누구인가? 현재 공동의 선을 구하는 후보는 안 보인다. 유권자 개인의 의사는 전체의사와 대개 불일치한다. 일치한다면 우연이다. 또 개인의 의사는 지속적이거나 항구적인 것도 아니다. 개인은 본질적으로 편파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이다. 일반계약에 정한 공동의 선이 아닌 이종(異種)의 권리나 특수한 사실이 등장하면 갈등이 생긴다. 이때 권력이 등장한다. 자연이 사람에게 생명을 부여한 것처럼 사회계약은 투표로서 국가와 통치자에게 권력을 부여한다. 국민은 투표 시에만 주권자로 대접받고 투표가 끝나는 순간 주권자의 지위는 곧 사라지고 만다. 고로 주권자는 실체가 없는 가공의 창조물이요 신기루와 같다. 또 주권은 권력을 만드는 부분품에 불과하다.

주권자의 전체의사는 항상 공명정대하고 언제나 공익과 부합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누구나 선택의 갈림길에 서면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택한다. 그러나 주권자는 무엇이 자신에게 이익인지 분간도 잘 못 한다. 그래서 국민은 정치인들의 현란한 세 치 혀에 매번 속아 넘어간다. 정치판을 보라. 항간에는 얕은 재주로 주권 개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장터에서나 써먹을 능란한 말솜씨로 곡학아세를 일삼는 정치인들이 있다. 이들은 궤변으로 유권자를 현혹한다. 우리는 귀를 열어야 한다. 큰 건물을 축조하기 전에 건축가는 지반이 건축물을 지탱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토질을 조사한다. 선거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건축가처럼 후보자들의 자질을 검증해야 한다.

한 당파의 의사는 항상 전체의사인 것 같지만 기실 일부 의사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파의 의사는 자신의 당파에는 전체의사이나 국가에 대해서는 일부 의사이고 개인 의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즉 선거에서 얻은 득표는 항상 보편성을 결하게 된다. 주권은 단체(국가)가 구성원(국민) 각자와 계약을 맺는 행위이다. 투표행위는 사회계약이고 주권 행위다. 주권계약은 만민에게 고루 적용되는 공평한 것이다. 이 계약은 일반의 복지와 안전을 도모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 주권자는 선택한 자에게 공공의 힘을 보장하고 권력을 부여한다. 오만한 철학이나 맹목적 당파심에 경도된 협잡꾼을 분간해야 한다. 국가는 구성원들의 단결로만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정신적 인격체이다. 국론이 갈리면 국력은 약화 될 수밖에 없다. 최대의 국력은 국민의 의사의 합일에서 나온다. 국민이 생존이 어려우면 교역과 전쟁 중 택일 할 수밖에 없다. 국가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일이다. 다가오는 초하(初夏) 대선은 국민주권을 덴푸라로 곡해하는 후보를 배제시키는 절차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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