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_대구교대교수2014.jpg
▲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자의 반 타의 반, 글 쓰는 것이 평생의 업(業)이 되고 말았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교내 백일장에 입선해서 글짓기 부에 들어간 것이 시초이니 반세기 넘도록 글을 써 왔습니다. 인생살이와는 별개로 제 글쓰기도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를 두루 거친 것 같습니다. 지금은 아마 노년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회고(回顧)가 많고 반성이 주류를 이룹니다. 투쟁이나 전망은 확연히 줄어들었습니다. 이룰 것보다는 내려놓을 것이 더 많이 눈에 띄는 나이입니다. 불과 4, 5년 전만 해도 보이지 않던 것들이 요즘은 많이 보입니다. 별로 그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던 것들에게서도 교훈을 얻을 때가 많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사분법(四分法)입니다.

인류가 즐겨 사용해 온 사분법의 바탕에는 사계절의 변화가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추론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순환을 보면서 인간은 변화와 분류의 네 가지 기준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사계절에 나타난 사분법의 친화성이 물, 불, 공기, 흙의 4원소설도 만들어내고, 동서남북의 사방(四方)도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적절한 유추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사등분 할 때 마음의 안정을 누립니다. 기하학적으로 가장 안정된 구도도 역시 사각형입니다. 중국에서는 고대로 사각형을 땅의 표상으로, 그리고 원을 하늘의 표상으로 여겨왔습니다. 사분법이 지닌 다양한 상징성은 인류 문화의 큰 기둥 중의 하나입니다.

장년기에 들어서 논어를 잠시 배울 기회가 있었습니다. 큰 스승 아래서 배운 것은 아니고 동학(同學)들끼리 돌려 읽는 수준에서 틈틈이 공부했습니다. 그때 본 공자님의 사분법이 재미가 있었습니다. “나면서 저절로 아는 사람은 최상이오, 배워서 아는 사람은 그다음이오, 막힘이 있으면서도 애써 배우는 자는 또 그다음이니라. 그러나 모르면서도 배우지 않는 사람은 하등이 된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孔子曰, “生而知之者上也, 學而知之者次也, 困而學之, 又其次也, 困而不學, 民斯爲下矣”)’論語·季氏]’사실, 이 말씀은 대학 시절에도 한 번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수업시간에 듣고 친구들 사이에서 ‘생지(生知)’를 자기 성 뒤에 붙여서 자칭하며 놀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시절 청년기는 모두 곤(困)할 때였습니다. 배움이 인생에서 얼마나 중한 가치인지 알 턱이 없었습니다. ‘생이지지’는 성인의 경지를 이르는 것이라며 공자님마저도 사양했습니다. 중용(中庸)은 “어떤 이는 태어나면서 알고 어떤 이는 배워서 알고 어떤 이는 힘들게 안다. 그 앎에 있어서는 하나이다”라고 해서 배움의 의지를 강조했습니다.

‘곤(困)’하면서도 배우지 않는 사람’들은 언제나, 어디서나 존재합니다. 공자님 시절에도 그들이 문제였고 지금도 그들이 문제입니다. 특히 문제인 것은, 그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나라를 좌지우지할 때입니다. 그들 때문에 선량한 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습니다. 공평과 정의가 설 자리를 잃고, 나라 경제와 안보가 풍전등화의 신세가 됩니다. 물론 그들만 탓할 것도 아닙니다. 그들에게 나라를 맡기는 국민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가파른 대선 정국을 맞이하고 있는 지금, 우리 모두의 분별력이 매우 소중한 때입니다. 혹시라도 ‘곤이불학자’에게 현혹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마침 현재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하고 있는 정당이 네 개이니 공자님의 사분법을 적용해서 그 이름을 하나씩 붙여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합니다. 생이지지당, 학이지지당, 곤이학지당, 곤이불학당 식으로요. 물론 각 당의 유력, 대표주자들에게도 이 사분법 평가를 한 번 적용해 보는 것도 전혀 무익한 일은 아닐 것 같고요.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