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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섭의 신삼국유사] 36. 만주벌판에 고구려가 세워지다

윤용섭 삼국유사사업본부장 등록일 2017년03월23일 16시31분  
고구려 벽화 (집안 고분 5호묘) 해와 달의 신
구이(九夷)와 삼한, 말갈과 부여까지 훑어 본 다음, 일연선사는 본격적으로 고구려의 탄생을 기록한다. 주인공은 물론 고주몽이다. 주몽은 이름도 거룩한 동명성제(東明聖帝)로 그려진다. 전회에 소개한 ‘북부여기’에 의거하면 북부여의 시조는 해모수, 동부여의 시조는 해부루, 졸본부여의 시조는 동명왕 고두막한, 고구려의 시조는 해모수의 아들 고진이며 고진의 증손자인 고주몽이 졸본부여를 합쳐서 고구려를 왕국으로 확대한 것이 된다. 이를 참고로 하면서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자.

고구려는 즉 졸본부여(卒本扶餘)다. 졸본주는 요동(遼東) 경계에 있었다. ‘국사(國史)’‘고려본기(高麗本記)’에 이르기를, 시조 동명성제의 성은 고(高)이고 휘(諱)는 주몽(朱蒙)이다. 앞서 북부여왕 해부루가 동부여로 옮겨갔는데, 금와가 후사를 이었다. 금와왕이 태백산(太伯山)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하백(河柏)의 딸 유화(柳花)를 얻었다. 유화가 말하기를,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와 웅신산(熊神山) 아래에서 어울렸는데, 해모수는 떠나고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단군기’에 이르기를, 단군이 서하(西河) 하백의 딸과 함께 사랑을 이루어, 아이를 낳으니 이름을 부루라 하였다 하니, 부루와 주몽은 이복형제가 된다. 금와왕이 이를 괴이하게 여기어 방 속에 그 여자를 가두었는데, 햇빛이 그 여자를 따라가며 비추는 것을 말미암아 잉태하여 크기가 다섯 되쯤 되는 알 하나를 낳았다. 금와왕이 이를 개·돼지에게 버렸으나 모두 먹지 않았고, 또 길 가운데 버렸으나 소와 말이 피하였고, 들에 버렸더니 새와 짐승이 덮어주었다. 왕이 이를 쪼개고자 하였으나 깨뜨리지 못하여 마침내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었다. 유화부인이 이를 물건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는데 골격과 외모가 뛰어났다. 일곱 살에 철이 들어 남달랐고,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니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의 속어에 활 잘 쏘는 이를 주몽이라 하므로, 그것이 이름이 되었다.

주몽이 건넌 엄리대수
금와왕에게 일곱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그 재주가 주몽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 맏이 대소(帶素)가 왕께 말하여 이르되, “주몽은 사람에게서 나지 않았으니 만약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려우니 그를 제거해 주소서” 라 하였다. 그러나 왕이 듣지 않고 그로 하여금 말을 기르게 하였다. 여러 왕자들이 신하·장수들과 더불어 그를 죽이려고 꾀하니, 주몽의 어머니가 알려 주며 피하게 하였다. 이에 주몽은 오이(烏伊) 등 세 사람과 벗이 되어 달아나다가 엄수(淹水)에 이르렀다. 물에게 이르되, “나는 천제의 아들, 하백의 외손이다(我是天帝子 河伯孫). 오늘 달아나고 있는데, 쫓는 자들이 거의 다가왔으니 어찌하리오?”라 하였더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이루어 주몽은 건널 수 있었고 쫓아오던 기병들은 건널 수 없었다.

졸본주에 이르러 나아가 도읍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미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다만 비류수(沸流水) 위에 임시거처를 짓고 거기에 머물러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였는데 이는 고(高)씨를 성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본래 성은 해(解)이다. 햇빛을 받아 태어났기 때문에 스스로 고씨라 하였다. 이때의 나이는 스물두 살이며, 한(漢)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년 갑신(甲申)년(기원전 37년)이었다. 고구려는 전성기 때, 가구수가 21만508호였다.

‘국사’를 인용한 ‘삼국유사’의 기록은 주몽이 해모수의 아들이라고 하고 있다. 해모수와 고주몽, 졸본부여와 고구려의 건국연대 등은 백제 건국과 함께 이설이 많은데, 다음 회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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