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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정체성을 말한다] 26. 가톨릭교회와 경북의 정체성

"선교보다 백성의 삶이 우선"…노블리스 오블리주 실천

김명현 디모테오 신부 등록일 2017년03월23일 19시19분  
▲ 김명현 디모테오 신부
지역민이 지닌 정체성의 변화를 가져오는 요소는 매우 많을 것이다. 그러한 요소 중에 분명 종교도 포함된다. 그렇다면 천주교는 경북의 정체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경북지역의 천주교 역사에 나타나는 몇 가지 사항을 살펴보자.

학문적 연구를 통해서 조선에 소개된 천주교는 세례를 받지는 않았지만 천주교의 가르침을 삶으로 생활한 곳이 바로 경북지역이다.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의 문하생들이 1750년 경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는 ‘천주실의’와 일곱 가지 죄(칠죄종)을 이겨내고 덕을 닦은 것을 소개한 ‘칠극’을 공부하였다.

성호의 제자 중 몽은 홍유한(洪儒漢1681-1785)은 학문적 연구를 넘어서 이를 실천하기로 결심하였다. 1757년 경 한양의 살림을 정리하고 충청도 예산으로 내려가 18년간, 1775년 현 영주시 단산면 구구리 지역으로 옮겨 10년간 혼자서 7일마다 축일(주일)을 경건하게 지냈고, 고행과 절식, 기도와 묵상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영위하였다. 그분의 신앙생활은 후손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후손과 제자들 가운데 순교자가 나왔다.

자생적으로 설립된 한국교회는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으로 선교의 자유가 인정되기까지 4대 박해를 비롯하여 수많은 박해를 받으면서 수만 명의 순교자를 내었다. 박해는 천주교 신자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그들을 죽음에 이르기까지 했지만,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전국으로 흩어짐으로써 천주교가 전국화되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박해를 피해 경북지역으로 이주해온 신자들은 예천과 청송, 진보, 영양, 한티 등에 신자촌을 형성하였고, 그 후 상주, 함창, 문경, 예천, 예안, 봉화, 의성, 칠곡 등에 신자들의 공동체인 공소가 형성되었다.

천주교 신자들은 박해를 받아 산골로 숨어들어 궁핍한 생활을 하는 가운데에도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했다. 달레 신부는 “교우들이 재산을 몰수당하고, 박해를 피해 이산 저산으로 숨어다니면서도 굶어 죽는 일이 없었다.”고 전하고 있다.

성 김대건 신부님의 작은 할아버지인 복자 김종한 안드레아는 경상도 영양 우련밭(현, 봉화 재산면 갈산리)이라는 산골 깊숙한 곳에 숨어 살면서 오로지 애긍시사에만 힘쓰다 1815년에 체포되었다. 그는 자선의 실천을 강조하면서 “애덕이 있으면 우리가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도 애덕을 위해 이 세상을 세우셨습니다. 만일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진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보존되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그는 자선에 애덕의 실천이며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의 뜻 안에 있다고 생각했다.

김수환 추기경 선종 8주기 추모 참배 모습.
천주교 신자들의 이웃사랑은 일차적으로 동료 신자였지만 불우한 이웃을 돌보는데 제한을 두지 않았다. 이와 같은 헌신적인 사랑은 사랑받는 사람의 마음을 풍요롭게 할 뿐 아니라 주변인들의 마음마저도 행복하게 만듦으로 세상을 변화하는 힘이 되는 것이다.

외교인들의 장례를 무료로 치러주기도 하였다. 1880년을 전후하여 대구지역에서 무료장례를 거행되었고, 그 후 서울을 비롯한 각 지역본당에서 인애회(隣愛會)를 설립되었다. 인해회는 “수납된 회비로 무의무탁한 노약자들이 거처할 집을 제공하며 사망 시에 초상을 치러주었다.” 뿐만 아니라 1884년에 대구본당에서 성영회를 설립하여 고아들을 돌보았다.

선교사들은 선교지에서 문맹퇴치를 위해 학교를 세우고, 또 육체적 질병의 치료를 위해 병원을 세운다. 경북지역의 천주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구본당에서는 1898년 어린이를 비롯한 신자들의 교육을 위해 해성제(海星齋)를 건립하였고, 각 지역에 본당이 설립되면서 본당별로 서당 혹은 학당을 설립하여 어린이들만 아니라 성인들에게도 교육을 함으로써 문맹퇴치에 크게 기여하였다.

1904년부터 교회는 개화기의 온건한 민족주의 운동으로서 애국 계몽 운동에 만족하지 못하고 반침략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황무지 개간령에 반대하는 기도회를 개최하였으며, 의병이 일어났을 때 경상도 일원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한 김상태는 일본군에 잡혀 사살될 때까지 묵조를 몸에 지니고 있었다. 안중근도 만주의 하얼빈에서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응징한 후 십자 성호를 긋고 대한 만세를 불렀다. 국채 보상 운동을 발기한 서상돈은 대구 지방의 대표적 신자였다. 서상돈은 사람을 대할 때 빈부귀천의 차별을 두지 않아 그의 사랑채에는 식객이 항상 십여 명씩 있었고 주일에는 수십 명씩 있었는데 이들에게 용돈까지 주어 가며 환대했다. 또 매년 춘추로 빈민들에게 양곡 수백 석씩을 희사하여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가 되었다.

1919년 3월 1일 시작된 3.1운동은 대구의 유스티노 신학교에서도 3월 8일에 있을 만세 시위에 합세하고자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 등을 제작하다가 프랑스인 선교사들에게 제재를 받기도 했다. 3·1운동 이후 가톨릭 교회 안에서 특별히 청년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22년 지방 대표 회의를 소집하고 경성구 천주교회 청년 연합회를 발족할 때 대구의 청년회도 함께하였다. 청년 연합회원들은 사회사업에 헌신하는 동시에 교육 사업과 출판 언론 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서울과 대구의 청년회는 복음과 천주교 정신을 사회에 전하고 윤리를 바로 잡기 위해 신문 형식의 기관지를 발간하였다. 1927년 대구 남방 천주교 청년회의 ‘천주교 회보’와 경성구 천주교회 연합회의「별」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당시 경북지역의 청년들은 경성지역의 청년들과 함께 사회의 발전을 위한 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교회는 이 사회에서 피팍받고 있는 노동자와 농민들을 위한 활동과 민주중의를 위한 활동하였는데 그 중심에 대구 남산동에서 출생하여 군위에서 성장한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있었다. 추기경은 사제로 서품(1951년)된 후 대구대교구의 사제로 안동성당과 김천성당, 가톨릭시보사 등에서 활동하였고, 1966년 마산 교구장으로 2년간 복무한 후 1968년 한국교회 최초로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추기경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갔을 뿐 아니라 그들을 위해 온 몸으로 헌신하였다.

김수환 추기경 선종 8주기 추모 참배 모습.
군사독재시대에 교회의 성직자들은 ‘정의구현사제단’을 통하여 또 노동자들은 ‘노동청년회’(JOC)를 구성하여 노동운동을 전개하였고, 농민들로 구성된 ‘가톨릭농민회’는 농지제도 개선, 농산물가격 보장, 농민조합의 민주화, 부당한 농지세제 시정 등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런 와중에 1979년 안동교구 가톨릭 농민회 사건이 발생하였다. 1978년 경북 영양군 청기면 농민들은 영양군과 농협에서 알선한 감사 씨를 심었으나 싹아 나지 않아 농사를 망치게 되었다. 이에 가톨릭 농민회 청기분회 회원들은 피해 농민들과 함께 대책을 논의하고 피해사항을 조사하여 보상을 요구하였다. 천주교 안동교구 사제단의 지원으로 피해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되었으나, 청기분회장 오원춘이 납치되어 감금 테러를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오원춘은 이 사실을 영양본당 정희욱 신부에게 밝혔다. 정신부는 안동교구사제들과 함께 ‘짓밟히는 농민운동’이라는 문건을 발표하고,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협력하여 이 사건을 폭로하였고, 김수환추기경과 정의구현사제단, 가톨릭 농민회와 신자들이 기도회를 개최하였다. 이들은 “구속자 석방”, “농민운동 탄압 중지”, “긴급조치·유신헌법 철폐”, “종교탄압 중지” 등을 요구하는 촛불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한 전국기도회가 서울, 인천, 수원, 대전, 광주, 전주, 마산 등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민주화 정치투쟁으로 발전하였다.

한국천주교회의 역사는 고작 230여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천주교는 근·현대 격동기를 우리민족과 함께 겪어왔다. 천주교는 학자들의 학문연구에서 시작되었지만 100여년의 박해를 가난한 백성들과 온몸으로 겪었다. 그런 가운데 교회는 선교보다는 백성의 삶을 먼저 생각하고 가난한 이에 대한 우선적 사랑을 실천해왔다. 이러한 사랑의 실천 근저에는 하느님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며, 모든 인간은 하느님을 닮은 존엄한 존재이며, 모든 사람은 사랑받아야 하며 인간다운 삶을 살 권리가 있음을 믿는 신앙이 자리하고 있다. 또 교회는 정의를 선포하고 실천함으로써 불의에 항거하고, 불의한 제도를 개선하기 위하여 계몽적인 활동을 해왔다. 교회가 사랑을 실천하고 정의를 선포하는데 있어서 비록 부족한 면이 있지만, 지역 주민들의 의식과 삶에 변화를 가져 온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교회의 그간의 활동이 지역민의 의식과 삶에 사랑과 정의의 정신을 심고, 사랑실천과 정의실현을 위한 문화를 이룩하는데 정체성 확립에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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