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수에 목욕하고 무에서 바람쐬며 큰뜻 펼칠 때를 기다리네
정여창을 배향하는 남계서원(灆溪書院)은 1552년(명종 7)창건된 뒤 1566년에 '남계(灆溪)'라는 이름으로 사액됐다. '남계'는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다. 남덕유산에서 발원해 안의 삼동 중 화림동계곡과 심진동계곡을 흘러온 물이 광풍루 앞에서 몸을 섞어 서원 옆을 지난다. 남계서원이 창건되고 사액을 받기 까지는 함양지역 선비 강익과 박승남 정복현 같은 이들의 노력이 컸다. 특히 강익은 서원창건을 주도한 뒤 서원이 창건되자 명종에게 사액상소를 올려 정부로부터 사액과 함께 노비와 토지를 얻어내는 성과를 거뒀다.
“정여창의 학문과 품행은 한 고을의 의표가 될 뿐만 아니라 학사의 모범이 될 만합니다. 그런 까닭에 추증하는 은전이 선왕조에서 융숭하였고 선비들의 추모가 오늘날에도 성대하게 일어나는 것입니다.(중략) 만약 정려하고 사액하여 널리 은전을 베푸신다면 위로는 선왕의 아름다운 뜻을 이루고, 아래로는 풍속을 교화하고 고무시키는데 일조가 될 것입니다” (강익 등의 사액상소문 중)
풍영루는 남계서원(南溪書院)의 2층 누각 출입문이다. 안동의 병산서원 만대루처럼 누각이 외삼문 역할을 한다. 18421년(헌종7)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으로 건축됐다. 풍영루의 특징은 누하주에 있다. 일반적으로 누각은 나무 기둥을 두게 마련인데 풍영루의 누하주는 팔각장대석으로 만들었다. 장대석은 주춧돌이 받치고 있다. 측면 두 칸의 가운데 기둥선에 대문을 설치하고 그 선에 맞추어 흙담장을 둘렀다는 점도 독특하다. 담장과 대문에 중심선을 맞추고 누각의 앞 뒤 누하주가 뻗어 2층누각을 떠받드는 형태다.
풍영루의 뒷면에는 ‘준도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본래는 누각 대신 외삼문인 ‘준도문(준도문)’이 있었는데 풍영루가 들어서면서 뒷면에 현판만 남아있다. 《중용》11장의 ‘군자는 도를 좇아 행하다가 그만두기도 하지만 나는 그만둘 수가 없다(君子遵道而行 半塗而廢 吾弗能已矣)’는 구절에서 빌려왔다. 끝없는 공부의 길을 독려하는 아포리즘이다.
서원의 누각은 치열하게 공부하던 유생들에게 휴식의 공간이었다. 서원은 제향의 공간이며 자신을 갈고 닦는 치열한 학업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 높은 성취를 위해서 휴식도 필요했으므로 유생들은 누각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시를 읊조리기도 하고 회식도 하며 추억을 만들기도 했다.
기정진은 풍영루 중수기에서 이렇게 썼다. “증점이 기수에서 목욕하고 바람을 쐰 후, 시를 읊으며 돌아오겠다고 한 것과 안연이 누추한 시골 거리에 살면서 도를 어기지 않음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였던 것은 그 규모나 기상이 비록 같지는 않지만 배우는 자들은 그 중 하나라도 없애거나 강론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이 분명하다. 이서원에 거경재와 집의재가 있는 것은 대체로 증자와 맹자의 뜻을 미루어 체용의 학문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이는 이른바 안자가 배운 바를 배우되, 시위를 당기기만 하고 풀어주지 않는다면 문왕과 무왕도 다스릴 수 없으니, 정신을 발산시키고 성정을 안정시켜 조양하는 한쪽 편의 일을 없앨 수 있겠는가.”
2층 마루는 휴식의 공간이지만 누마루 곳곳에 휴식 중 선비들의 입신양명을 압박하는 장치들로 가득하다.2층 누마루에서 눈에 띄는 것은 대들보에 새겨진 청룡과 황룡이다. 두 개의 가로 지른 커다란 대들보에 새겨진 용은 금방이라도 지붕을 깨고 하늘로 올라갈 듯 생생하고 묘사되고 있다. 남계서원이 인재들의 등용문으로 우뚝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을 것이다. 기둥과 기둥 사이의 창방에는 국화를 사실감 있게 묘사했다. 이 국화반은 정여창이 유영하던 화림동 계곡의 동호정에서도 볼 수 있다. 오상고절은 선비의 기개이다. 추녀 끝에 부연개판에 그려진 봉황 역시 입신양명을 상징하는 장치이며 오른편 보이는 멀리 정여창의 생가도 이곳에서 공부하던 선비들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작용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