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수에 목욕하고 무에서 바람쐬며 큰뜻 펼칠 때를 기다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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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군 수동면에 있는 사적 제499호인 남계서원은 일두 정여창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추모하기 위해 1552년 개암 강익을 비롯해 지방 유생들이 건립했다.
영남사림을 대표하는 지역이 안동과 함양이다. 낙동강을 중심으로 동쪽에 안동이 있고 서쪽에 함양이 있다. ‘좌안동 우함양’이라 부른다. 안동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고향이고 함양은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1450∼1504)의 고향이다. 이들은 고향에서 ‘칼’을 갈아 사직에 나아가 이름을 떨쳤으며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를 양성하며 씨를 뿌렸다.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과 함께 조선 성리학 5현으로 추앙 받고 있다.

정여창을 배향하는 남계서원(灆溪書院)은 1552년(명종 7)창건된 뒤 1566년에 '남계(灆溪)'라는 이름으로 사액됐다. '남계'는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다. 남덕유산에서 발원해 안의 삼동 중 화림동계곡과 심진동계곡을 흘러온 물이 광풍루 앞에서 몸을 섞어 서원 옆을 지난다. 남계서원이 창건되고 사액을 받기 까지는 함양지역 선비 강익과 박승남 정복현 같은 이들의 노력이 컸다. 특히 강익은 서원창건을 주도한 뒤 서원이 창건되자 명종에게 사액상소를 올려 정부로부터 사액과 함께 노비와 토지를 얻어내는 성과를 거뒀다. 

“정여창의 학문과 품행은 한 고을의 의표가 될 뿐만 아니라 학사의 모범이 될 만합니다. 그런 까닭에 추증하는 은전이 선왕조에서 융숭하였고 선비들의 추모가 오늘날에도 성대하게 일어나는 것입니다.(중략) 만약 정려하고 사액하여 널리 은전을 베푸신다면 위로는 선왕의 아름다운 뜻을 이루고, 아래로는 풍속을 교화하고 고무시키는데 일조가 될 것입니다” (강익 등의 사액상소문 중)

▲ 풍영루는 남계서원의 출입문 역할을 하는 2층 누각이다
서원은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때 불에 탄 뒤 나촌으로 터를 옮겼다가,1612년(선조 43) 현재의 위치에 다시 옮겼다. 풍기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건축이 시작된 서원이다.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 하나다. 서원 입구에는 홍살문과 하마비가 세워져 있고 동재인 양성재와 서재인 보인재, 강하당인 명성당과 사당이 있다. 사당에는 정여창을 주벽으로 하여, 좌우에 정온(鄭蘊, 1569∼1641)과 강익(姜翼, 1523∼1567)의 위패가 각각 모셔져 있다.

풍영루는 남계서원(南溪書院)의 2층 누각 출입문이다. 안동의 병산서원 만대루처럼 누각이 외삼문 역할을 한다. 18421년(헌종7)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으로 건축됐다. 풍영루의 특징은 누하주에 있다. 일반적으로 누각은 나무 기둥을 두게 마련인데 풍영루의 누하주는 팔각장대석으로 만들었다. 장대석은 주춧돌이 받치고 있다. 측면 두 칸의 가운데 기둥선에 대문을 설치하고 그 선에 맞추어 흙담장을 둘렀다는 점도 독특하다. 담장과 대문에 중심선을 맞추고 누각의 앞 뒤 누하주가 뻗어 2층누각을 떠받드는 형태다.

풍영루 현판. 증점이 공자에게 바람을 쐰 후 노래부르며 돌아오겠다고 대답한 귀절에서 따왔다
풍영루는 공자와 제자의 대화 중 증점의 답변에서 따왔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물었다. ‘너희들의 소원이 무엇이냐’ 염유가 말했다. ‘ 작은 고을을 맡아 3년 만에 풍요롭게 만들겠습니다’ 공서화는 ‘종묘제사나 회의 때 보좌관 노릇을 하고 싶습니다.’ 그때 증점이 말하기를 ‘봄철 입는 관복이 만들어지면 관자 5,6명과 동자 6,7명을 데리고서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에서 바람 쐰 후 노래 부르면 돌아오고 싶습니다.(春服既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春服既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 공자가 그 말을 듣고 대답했다. ‘나도 너와함께 하고 싶다 (吾與點也)’

풍영루의 뒷면에는 ‘준도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본래는 누각 대신 외삼문인 ‘준도문(준도문)’이 있었는데 풍영루가 들어서면서 뒷면에 현판만 남아있다. 《중용》11장의 ‘군자는 도를 좇아 행하다가 그만두기도 하지만 나는 그만둘 수가 없다(君子遵道而行 半塗而廢 吾弗能已矣)’는 구절에서 빌려왔다. 끝없는 공부의 길을 독려하는 아포리즘이다.

서원의 누각은 치열하게 공부하던 유생들에게 휴식의 공간이었다. 서원은 제향의 공간이며 자신을 갈고 닦는 치열한 학업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 높은 성취를 위해서 휴식도 필요했으므로 유생들은 누각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시를 읊조리기도 하고 회식도 하며 추억을 만들기도 했다. 

기정진은 풍영루 중수기에서 이렇게 썼다. “증점이 기수에서 목욕하고 바람을 쐰 후, 시를 읊으며 돌아오겠다고 한 것과 안연이 누추한 시골 거리에 살면서 도를 어기지 않음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였던 것은 그 규모나 기상이 비록 같지는 않지만 배우는 자들은 그 중 하나라도 없애거나 강론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이 분명하다. 이서원에 거경재와 집의재가 있는 것은 대체로 증자와 맹자의 뜻을 미루어 체용의 학문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이는 이른바 안자가 배운 바를 배우되, 시위를 당기기만 하고 풀어주지 않는다면 문왕과 무왕도 다스릴 수 없으니, 정신을 발산시키고 성정을 안정시켜 조양하는 한쪽 편의 일을 없앨 수 있겠는가.”

풍영루 안에서 본 백암산
풍영루에 올라보면 탁트인 들판 저 멀리 정여창의 생가 일두고택이 있는 개평마을이 보이고 그 뒤로 백암산이 보인다. 남계서원과 일두고택 사이에 남계가 흐른다는데 시야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오른쪽에 탁영 김일손을 제향하는 청계서원이 들어오고 멀리 정상에 나무 두 그루가 우뚝 서 있는 독특한 봉우리가 보인다. 옛어른들은 이런 봉우리를 붓을 닮았다고 ‘필봉’이라 했는데 실제 그렇게 부르는 지는 알 수 없다. 누각 안에는 정환필과 기정진이 쓴 ‘풍영루기’가 각각 걸려 있는데 정환필이 옛날 풍영루에서 내려다본 이 일대 풍경을 잘 그리고 있다.

남계서원의 강학당인 명성재
“(다락집이) 높이가 백자도 되지 못하나 멀리 임해서 사방으로 바라보이는 경치가 들판이 평평하게 넓고 냇물이 감돌아 얽히듯 했는데 먼 숲은 푸르고 저녁 노을이 아름답도다. 백암산의 두어집이 저문 빗속에 들어 반쯤이 나 숨었고 뇌계의 한쪽 면은 아침 햇볕에 온전히 드러났도다. 대나무와 잣나무 우거진 앞마을에는 우는 새들이 봄을 재촉하고 벼의 옛골목에는 농부가 가을 농사를 점 치도다. 풍월이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운애가 재주를 드리우는데 한번 슬쩍 보아도 천 가지 기이함이 황홀하여 형상하기 어렵도다. 이다락에 오르면 넓어지는 마음과 편안한 정신이 자연 속에 자맥질하여서 유연히 스스로 얻은 것이 있는 듯하다. 하물며 두륜산의 만첩 봉우리와 화림천의 아홉구비의 흐름에서 거의 선생의 풍표를 보고 선생의 기상을 우러러 볼 수 있음이니 흡사 선생이 계신 자리에 뫼시고 서서 증점이 쟁그렁하고 비파를 밀쳐 놓던 뜻이 있는 듯한 까닭으로 하여 풍영루라 하였다”

▲ 글 사진 / 김동완 여행작가
2층 마루는 휴식의 공간이지만 누마루 곳곳에 휴식 중 선비들의 입신양명을 압박하는 장치들로 가득하다.2층 누마루에서 눈에 띄는 것은 대들보에 새겨진 청룡과 황룡이다. 두 개의 가로 지른 커다란 대들보에 새겨진 용은 금방이라도 지붕을 깨고 하늘로 올라갈 듯 생생하고 묘사되고 있다. 남계서원이 인재들의 등용문으로 우뚝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을 것이다. 기둥과 기둥 사이의 창방에는 국화를 사실감 있게 묘사했다. 이 국화반은 정여창이 유영하던 화림동 계곡의 동호정에서도 볼 수 있다. 오상고절은 선비의 기개이다. 추녀 끝에 부연개판에 그려진 봉황 역시 입신양명을 상징하는 장치이며 오른편 보이는 멀리 정여창의 생가도 이곳에서 공부하던 선비들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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