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문 포스텍 명예교수
철학이 빈곤한 이 시대의 인문학 석학이자 시인인 포스텍 박이문(본명 박인희)명예교수가 26일 오후 10시에 별세했다. 향년 87세.

‘우리 시대의 철학자’, ‘둥지의 철학자’로 불리는 고인은 1930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서울대 불문과에 진학한 뒤 1955년 ‘사상계’에 ‘회화를 잃은 세대’라는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논문 ‘폴 발레리에 있어서 지성과 현실과의 변증법으로서의 시’로 석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곧바로 이화여대 전임강사로 발탁됐지만, 1961년 교수직을 버리고 프랑스로 떠나 파리 소르본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 고인이 쓴 박사 논문이 파리에서 출판됐을 때 하스미 시게히코(蓮實重彦) 전 도쿄대 총장이 책을 서점에서 접하고 저자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놀랐다는 일화가 회자할 정도로 뛰어난 학문적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그는 세계의 본질과 삶의 의미를 탐구하기 위해 미국으로 넘어가 서던캘리포니아대에서 철학을 공부해 다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평생 철학 연구에 매진하면서 언어학, 예술, 동양사상, 과학, 환경, 문명, 종교 등으로 끊임없이 학문적 관심사를 넓혀 나갔다.

고인은 당대 세계적인 사상가들의 가르침을 배웠지만 어느 한 사상가의 철학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학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남과는 다른 학문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필명을 ‘이문’(異汶)으로 짓기도 했다.

그의 철학적 세계관은 ‘둥지의 철학’으로 요약된다. 고인은 “세계관으로서의 철학이라는 건축활동, 그 동기와 건축구조는 새의 둥지 짓기와 같다”며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이 하나의 그림이라면 그 상(像)이 자연과 더불어 사는 ‘둥지’와 같은 것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으로 고인은 수십 년간 철학적 사유를 한 끝에 ‘어떠한 것에도 절대적인 답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자신을 ‘허무주의자’로 규정하기도 했다. 2013년 사회학자 정수복 씨가 고인과 대담을 나눈 뒤 출간한 책의 제목도 ‘삶을 긍정하는 허무주의’였다.

그는 평소 저술 활동도 활발히 해 ‘시와 과학’, ‘철학이란 무엇인가’, ‘예술철학’, ‘둥지의 철학’, ‘과학의 도전, 철학의 응전’, ‘당신에겐 철학이 있습니까’, ‘문학 속의 철학’ 등 100여 권의 저작을 남겼다. 저서 중 일부는 독일, 영국, 중국에서 번역 출간됐고, 수필 ‘나의 길, 나의 삶’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다.

지난해는 고인이 20대 시절인 1950년대 후반 발표한 시부터 최근까지 60여 년 동안 남긴 글을 추려 묶은 ‘박이문 인문학 전집’(전 10권)이 출간되기도 했다.

당시 전집을 펴낸 출판사 미다스북스는 고인에 대해 ‘삶의 의미는 궁극적으로 무엇이며 대체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가장 쉽고 명징한 언어로 인문학 전반을 탐구한 인물’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류종렬 미다스북스 대표는 고인이 별세하기 전 그를 대신해 쓴 글 ‘남기고 싶은 말’에서 “세상을 사물들과 사건들, 그리고 그것들 간의 물리적·정신적 관계의 총칭으로 규정한다면, 그것은 한편으로는 한없이 복잡하고 혼란스럽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의 경이로운 질서가 우리를 황홀케 한다”며 “나는 일찍부터 이런 상반된 감동을 시인으로서 언어에 담아두고 싶어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철학자로서 그러한 질서를 논리적으로 밝혀내겠다는 집념에 사로잡혀 살아왔다”고 적었다.

유족으로는 부인 유영숙 여사와 아들 장욱 씨가 있다.

빈소는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13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29일 오전 6시 30분이며, 장지는 국립 이천호국원. 02-2227-7500.


곽성일 기자
곽성일 기자 kwak@kyongbuk.com

행정사회부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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