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대 할머니 착각에 5천만원 피해 모면…농협 "바빠서 신고 못해" 변명

전화금융사기(보이스 피싱)범행에 속은 70대 할머니가 범인의 지시를 엉뚱한 방법으로 실행했다가 5천만 원의 피해를 모면한 것으로 드러났다. 사연은 지난 24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전 11시께 대구 수성구에 사는 A(72) 할머니는 낯선 전화를 받았다. 금융감독원 직원을 사칭한 범인은 “개인정보가 노출됐다. 통장계좌에 있는 돈이 빠져나갈 수 있으니 빨리 현금으로 찾아라”고 종용했다.

정오께 집 근처 농협에서 현금 5천만 원을 찾은 할머니는 “세탁기에 넣어두면 직원이 안전하게 보관해주겠다”는 말을 들었고, 범인에게 현관 비밀번호까지 가르쳐줬다.

오후 2시 20분께 7층에 있는 A 할머니의 현관 앞에 있던 범인은 “사진 촬영을 해야 하니 1층으로 내려오라”고 유인했고, 그 사이 범인은 할머니 집에 들어가 세탁기를 뒤졌으나 5천만 원을 찾지 못했다. 세탁기에 돈을 두라는 사실을 깜빡 잊은 할머니가 세탁기 맞은편 주방 찬장에 돈을 뒀기 때문이다.

3시 30분께 1층에서 범인을 만나지 못한 할머니는 7층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향했고, 할머니 집에서 돈을 찾지 못한 채 나오던 범인과 마주쳤다. 곧바로 범인은 도주했지만, 할머니의 연락을 받은 딸이 보이스 피싱 범인을 잡아 달라고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 관계자는 “상황이 엉뚱하지만 어쨌든 할머니가 큰 화를 면해서 다행이다. 폐쇄회로(CC)TV에 담긴 영상을 분석해 달아난 범인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A 할머니는 사기 범행을 피할 수 있었지만, 은행 측의 대응은 아쉬운 대목이 많았다. 예방할 기회를 놓쳤다.

대구경찰청은 농협 등 대구지역 11개 금융기관과 협약을 맺었고, 고액인출자에 대해 경찰이 배부한 매뉴얼에 따라 보이스 피싱이 의심되면 112로 신고하도록 했다. 특히 1천만 원 이상 현금을 찾는 모든 고객에 대해 경찰에 신고하는 제도도 운용하고 있다.

하지만 A 할머니 집 근처 농협은 이 같은 절차를 지키지 않았고, 왼쪽 다리가 불편한 상태로 지팡이를 짚으면서 현금 5천만 원을 직접 들고 귀가하는 할머니에 대해 은행 내부 청원경찰의 도움도 주지 않은 데다 경찰에 보호 요청도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농협 대구영업부 측은 “보이스 피싱 이야기를 하면서 할머니를 달랬는데 막무가내로 인출을 요구해서 5천만 원을 내줄 수밖에 없었고, 창구 직원이 바빠서 112에 신고하지 못했다”면서도 “청원경찰이 바쁜 상황이어서 경찰 순찰차도 부르지 못한 상태에서 택시를 잡아 할머니를 태워 드렸다”고 밝혔다.

배준수 기자
배준수 기자 baepro@kyongbuk.com

법조, 건설 및 부동산, 의료, 유통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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