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전’에서 말하기를, 대유는 부드러운 것이 존위를 얻고 크게 가운데가 되어 위와 아래가 응하기 때문에 대유라 하니, 그 덕이 강건하여 문명하고 하늘에 응하여 때에 맞춰 행하는지라, 이로써 크게 형통하니라.
‘상전’에서 말하기를, 불이 하늘 위에 있는 것이 대유이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 악을 막고 선을 선양해서 하늘을 따라 (만물의) 성명(性命)을 아름답게 이루니라. ‘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부드러운 것이 존위를 얻고 크게 가운데가 되어 악을 막고 선을 선양한다’라는 말이 듣기에 참 좋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정치 지도자 상에 정확하게 부응하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을 다 포용하면서 적폐를 청산하고 나라의 미래를 굳건히 할 수 있는 지도자를 우리는 원합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대선 정국에서도 그런 슬로건을 내건 후보자들을 많이 봅니다. 워낙 큰 반면교사(反面敎師·다른 사람이나 사물의 부정적인 측면에서 가르침을 얻음)를 겪은 뒤라 국가가 당면한 큰 위기의 시간에 스스로 큰 수레를 자처하는 이들의 면모도 예전과는 사뭇 다릅니다. “이 정도면 누가 되어도 무방하다”라는 말을 주위에서 종종 듣습니다. 민심과는 유리된 인위적인 정치공학적 구도들이 이래저래 설 땅을 잃으면서 더 그런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누가 당선되어도 이번에는 반드시 ‘화천대유’가 실현되어야 한다는 당위론적인 믿음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민심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화천대유’에는 ‘복병’이 숨어있습니다. 주역에서 말하는 ‘큰 수레(大車)’는 그냥 큰 수레가 아닙니다. 이를테면 겉모양이 아니라 속모양입니다. 이어진 설명에 “대거이재(大車以載)는 가운데에 쌓아서 실패하지 않음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핵심은 ‘적중불패’(積中不敗)입니다. 수레가 아무리 커도 가운데 싣지 않으면 실패한다는 것, 즉 ‘큰 수레’는 외견상으로, 적재량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짐을 가운데 실어 위태롭지 않은 수레가 ‘큰 수레’입니다. 몇 바퀴 구르지 못해서 파탄이 나는 수레는 아무리 커도 큰 수레가 아닌 것입니다. 짐을 아무리 많이 실어도 한쪽으로 기울어져 출발하자마자 이내 넘어지는 수레는 큰 수레가 아닙니다. 부드러우면서도 균형 감각이 있고, 미래에 대한 확실한 비전이 있는 지도자, 식견을 갖추어 스스로 자립, 자강할 수 있는 지도자만이 진정한 국가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지도자를 가진 나라는 오래 번성할 수 있다고 주역은 가르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