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9년 일본 후쿠야마를 다녀왔다. 포항시와 일본 후쿠야마의 자매결연 30주년과 장미축제를 취재하기 위한 방문이었다. 짜여진 취재 일정에도 잠시 짬을 내서 가까이 있는 히로시마를 찾았다. 1996년 유네스코가 ‘인간의 실수와 어리석음을 상징하는 히로시마 원폭 돔은 핵무기를 폐기하고 영원한 인류 평화를 추구한다는 서약의 상징입니다’라는 단서를 달아 원폭 돔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한 히로시마평화기념공원을 꼭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1945년 8월 6일 8시 15분, 원자폭탄이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됐다. 검은 버섯구름과 함께 발생한 열과 폭풍은 순식간에 인구 34만 명의 도시를 삼켜버렸다. 14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인류의 잔인한 학살극을 잊지 않기 위해 만든 평화기념공원에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은 원폭 돔도, 위령비도 아니었다. 그곳은 한 소녀가 학을 바쳐 들고 있는 동상 앞이었다. 이 동상은 원폭 피해를 입은 한 소녀가 장수의 상징인 종이학 1000마리를 접으면 병이 낳는다는 전설을 믿고 학을 접다가 숨진 슬픈 사연을 담고 있었다. 소녀는 964마리의 종이학을 접은 뒤 끝내 숨졌다. 이후 이 사실이 알려지자 일본 각지에서 종이학을 접어 평화기념공원으로 보내왔다. 이 같은 사연으로 인해 종이학은 반전과 반핵의 상징이 됐다.

지난해 5월의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종이학 외교’도 이 이야기가 근원 설화다.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피폭지 히로시마를 찾았을 때 직접 접은 종이학 4마리를 전했다. 이중 2마리는 원폭 피해 가족인 2명의 학생들에게 선물했고, 나머지 2마리는 원폭 자료관 방명록 옆에 놓았다. 오바마는 학을 전해 원폭 피해를 입은 일본인은 물론, 재일 조선인, 미군 전쟁포로 등 원폭으로 희생된 이들에게 에둘러 사죄의 뜻을 전한 것이다.

29일에는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핵무기금지협약 협상 회의장 일본 대표단의 자리에 흰색 종이학이 놓였다고 교도통신이 전했다. 핵무기폐기국제운동 회원들이 세계 유일 피폭국이면서도 핵무기금지협약 협상에 불참한 일본에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의 호전적 우경화와 군사력 증강을 보면서 0.2g 종이학의 가볍지 않은 의미를 다시 한 번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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