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곡물에 발 담그고 시 한수 차 한잔의 풍류, 신선인들 부러우리

▲ 거연정은 계곡 가운데 자연암반 위에 세워져 정자를 받치는 기둥의 길이가 제각각이다.
경남 함양군 안의면 화림동(花林洞) 계곡은 주변의 산들이 합창으로 빚어낸 맑고 고운 소리같다. 덕유산·월봉산·거망산·황석산이 갈라지면서 그 사이 사이에 계곡이 들어설 틈을 내주었고 산 사이에 들어선 계곡은 어김없이 물로 공간을 채웠다. 

네 개의 산에서 흘러내려온 물줄기가 합쳐지는 곳이 비단내, 금천(錦川)이다. 햇빛에 비친 물이 비단결처럼 곱다는 말이다. 갈라진 산들은 계곡을 물로만 채우지는 않았다. 시간의 힘을 빌어 기암과 괴석 그리고 반석을 다듬고 소를 만들어 계곡의 품격을 더하고 장엄을 갖추었다. 

거연정 전경.화림동 계곡물은 정자 앞에서 두갈래로 갈라졌다가 정자앞에서 다시 합류해 흐른다.
화림동, 이름 그대로 꽃과 숲을 배치해 명승의 이름을 더했다. 계곡을 흐르는 물은 쿵쾅쿵쾅 소리치며 흐르거나 숨죽여 엎드려 흘렀다. 이 계곡의 길이가 60리나 된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이곳을 백두대간 남쪽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으며 조선의 무릉도원으로 여겼다. 안의현감으로 부임해왔던 연암 박지원이 이곳에 들렀다가 “한양 사람들이 무더운 여름날 화림동계곡에 발 담그고 탁족 한번 해보는 것이 소원이라더니 과연 화림동이구나”라고 감탄했다는 곳이다.

자연을 닮고 싶어 하는 이들이 화림동 계곡에 몰려 들었다. 저마다 정자를 세우고 현판을 붙이고 시를 읊었다. 거연정 농월정 등 8개의 정자가 들어섰다. 자연이 만든 8개의 연못과 묶어 ‘팔담 팔정’이 됐다. 

거연정명은 주자의 시 ‘무영잡영’ 중 자연속에서 살겠다는 싯구에서 따왔다.
정자는 화림동계곡의 주인이 됐고 계곡은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정자문화의 메카‘가 됐다. 8개의 정자 가운데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이 거연정이다. 고종 때 대사헌을 지낸 임헌회(1811-1876)는 거연정 기문에서 “영남의 명승 중에서 안의삼동이 가장 빼어나고, 그 중에서도 화림동이 최고이고, 화림동의 명승 중에서 거연정이 단연 으뜸”이라고 적고 있다.

물가의 작은 정자가 바위틈에 의지하여
좋은 경치 아름답고 기이하니 모습을 숨기지 못하는구나
돌의 기운은 청량하여 골수를 통하고
물빛은 형철하여 심령을 비추네
화림의 풍물이 삼동을 기울게 하니
미노의 후손들이 이 물을 관할했네

- 김계진의 시 ‘거연정운’

거연정은 조선중기 가선대부와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화림재(華林齋)전시서(全時敍)가 1640년(인조 18)께 서산서원을 지을 당시 억새로 만든 정자이다. 전시서는 전오륜의 7대손인데 전오륜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는 말도 있다. 전오륜은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두문동으로 들어간 72현 중 한 사람으로 호는 채미헌이다. 

거연정은 화림동 계곡 가운데 자리잡아 자연의 일부가 됐다.
그후 서산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됐으나 정자는 존속됐다. 1872년 전시서의 7대손 전재학(全在學) 등이 억새로 된 정자를 철거하고 훼철된 서산서원의 재목으로 재건립했다가 1901년에 중수했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이다. 정자 안에는 벽체를 판재로 구성한 판방을 1칸 두고, 각주로 네 귀퉁이를 받치고 있다. 기둥의 바깥쪽으로 약 30㎝ 정도를 연장하여 계자난간을 둘렀다. 울퉁불퉁한 기암 위에 지은 집이라 굴곡이 심한 암반의 높이를 조절하기 위해 기둥의 주춧돌을 놓은 기둥도 있고 놓지 않은 기둥도 있다. 어떤 기둥은 길고 어떤 기둥을 짧다. 기둥은 모두 원주이며, 누하주는 직경이 큰 재목을 틀어지거나 울퉁불퉁한 채로 대강 다듬어 자연미를 살렸다.

거연정의 ‘거연’은 주자의 ‘무이정사잡영(武夷精舍雜詠)’ 12수 중 첫수의 ‘거연아천석 居然我泉石’에서 가져왔다.

거문고와 책읽기 사십 년 琴書四十年
거의 산중의 나그네 되었네 幾作山中客
하룻 만에 띠집 지을 수 있으니 一日茅棟成
그렇게 나는 천석 사이에서 사노라 居然我泉石

거연정 안에서본 계곡.
주자는 말년에 무이계곡에 무이정사를 짓고 자연을 벗하며 살았다. 무이구곡을 운영하며 시를 읊고 후학을 가르쳤는데 조선선비들에게 ‘퇴후지지’의 롤모델을 제시했다.주자의 무이구곡은 조선의 내로라하는 선비들에게 영향을 미쳐 조선의 아름다운 산천은 구곡문화의 시연장이 되다시피했다. 이황이 도산구곡을, 이이가 고산구곡을 경영했으며 송시열이 화양계곡의 아름다운 경승들을 ‘화양구곡’으로 묶어 시를 짓고 소요했다.

정자의 주인인 전시서도 조선의 성리학자 누구나가 그랬듯이 주자를 닮고 싶었을 것이다. ‘무이정사잡영’에서 편액이름을 따온 그는 시에 나오는 그대로 억새로 띠집을 짓고 자연의 일부가 된 정자를 드나들며 시를 읊고 후학을 가르쳤다. 그마음은 ‘옛 안의현 서쪽 화림동에 신평마을이 있었는데 산과 물이 그윽하고 깊으며 산수가 맑고 아름다워 화림재 전공(전시서)이 세상이 어지러울 때 이곳에 은거하였다’라는 화림재전공유허비에 잘 나타나 있다.

정자를 앞두고 탄성이 터져 나온다. 정자로 내려가는 입구부터 예사롭지 않다. 아름드리 노송과 느티나무, 오랜 세월 계곡과 정자를 지켜온 노거수들이 기암괴석과 어우러져 장엄하다. 정자는 계곡의 한 가운데 바위섬에 자리 잡았다.계곡과 정자사이에는 무지개 다리가 놓여있다. 화림교다. 화림교 아래 계곡물은 눈이 아리도록 짙푸르다. 

정자가 놓여있는 바위섬은 기암과 괴석의 박물관 같다. 울퉁불퉁한 바위는 제각각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 만물상이라 이름붙여도 좋겠다. 만물상 중에서 정자는 독보적이다. 바위섬의 지배자다. 자연암반 위에 세워진 정자는 처마를 받치는 활주 덕에 하늘로 날아오르듯 치켜져 있다.

거연정 안에서 본 화림교
일반적으로 계곡가의 정자는 산수를 바라보는 관찰자의 입장이 강하다. ‘관어대’라든가 ‘관수루’ 같은 누정이 그렇다. ‘요수정’도 바라보고 좋아한다는 점에서 마찬가지 관점이다. 거연정은 관찰자 입장을 벗어던지고 자연 속으로 걸어 들어가 자연의 일부가 됐다. 강 건너 언덕에서 내려다 보는 거연정은 그냥 자연의 일부다. ‘돌과 냇물과 함께 자연에 거하는 정자’다. 

정자는 안에서 보는 바깥 경관도 남다르다. 정자 뒤쪽을 보니 멀리 덕유산 등이 보이고 산에서 흘러내려온 화림동 계곡이 정자가 있는 바위섬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섬의 옆구리를 휘돌아 나갔다가 정자 앞에서 합수해 안의면 쪽으로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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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사진 / 김동완 여행작가
이 경관을 송병선은 중수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거연정에 올랐던 바 물소리가 획획하여 둘려있는 밖으로 새소리 산만하고 여울물이 빙빙 돌아 연못이 되어서 무늬가 벼무늬 같고 그 소리가 거문고 가락 같다.(중략) 이에 가슴에 기분이 상쾌하고 시원함에 아득한 호기와 더불어 함께 그 끝이 볼 수 없으니.” 

정자 안은 송병준의 ‘거연정중수기’외에 김계진, 신병진등의 시문이 가득하다. ‘백두대간 남쪽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정자’를 보기 위해,‘발 담그고 탁족 한번 해보는 것이 소원’ 이라는 선비들이 줄을 이어 이곳을 찾았고 시를 남겼던 것이다.

늙어감에 오히려 흥이 겨워서
좋은 때에 문득 유람하게 되었네
아름답기로 소문난 세 고을 땅에는
전씨 가문의 백년된 정자가 있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터전이 있고
산은 태고의 정을 머금었네
조용하고 앞이 탁 트이면서 열려 있어
낮은 소리로 읊으면서 물가로 가네

- 송병선의 시 ‘거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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