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적 사랑, 종교를 넘어 이시대 치유할 희망의 구심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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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정석 평안교회 담임목사·철학박사 겸 신학박사
오늘날 지역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정체성의 혼란이 아닌가 생각된다. 정체성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 근대한국을 만드는 데 앞장서온 기독교가 본래의 기능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 사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교회(카톨릭, 개신교 포함)가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을 부인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체성 상실은 태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6-17)” 최초의 인류는 뱀(serpent)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죄를 범하고 있다. 이후로 하나님과 분리된 인류는 영원한 사랑(agape)을 상실한다.

우리 사회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교회는 무엇을 하는 곳일까? 교회가 본연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당위성을 가진다면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에 대한 해답은 당연히 ‘사랑(agape)’에 있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그 해답을 상실하였지만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회복하였다.

신명여고
초기의 교회(개신교)는 평양 대부흥운동을 일으켰다. 평양 대부흥운동은 우리 나라의 근대 교육의 형성에 끼친 영향이 상당히 크다. 평양대부흥운동을 통한 영적 각성 운동은 주일 학교의 부흥 뿐 아니라 ‘일교회 일학교’ 운동으로 이어져 실제로 우리나라 근대 교육의 태동기에 큰 영향을 주었다. 경북지역에는 대구 신명여고 등 여러 학교들이 지역사회에 영향을 주었다. 신명여고(오른쪽 사진)는 1902년 5월 10일 : 선교사 Martha Scott Bruen(부마태 傅馬太)여사가 의료선교사 Woodbridge O. Johnson M.D(장인차) 부인 Edith M. Parker의 바느질반(Sewing Class)과 놀스양(Miss Nourse)이 가르치던 매주 월요일 오후반의 15세미만 소녀 14명을 인수하여 대구 선교지부(Daegu mission center)에 신명여자소학교(Girls’ Primary School)를 설립 개교하였다. 이를 계기로 달서여학교(1905)와, 신명학교(1907), 성립여학교(1910), 명신여학교(1910) 등이 차례로 문을 열었다.

교회의 교육은 삼일 운동으로 꽃 피웠다. 유관순(柳寬順)선생은 행복한 학교생활 속에서도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조국과 민족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을 잃지 않았다. 선생의 조국애와 민족애는 곧 이어 봉기하여 전개된 1919년 3월 1일 만세 운동을 시작으로 만세 독립운동은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지역에서는 3월 8일과 3월 10일에 대구의 만세 시위운동이 전개돼 경상북도내로 파급되었다. 안동에서는 1919년 3월 17일 예안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된 뒤 3월 말까지 계속해서 격렬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안동교회(아래사진: 안동 교회와 교인들 1914년경, 경북)는 그 중심에 서 있었다.

교회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만들어 내는데 기여했다. 기독교가 주동은 아니더라도 민주화에 도움을 준 것은 맞다. 그들의 강한 반공 정서는 냉전적 통치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한때 한국 기독교는 민족의 희망으로 인정되었다. 개항 이후 새로 형성되는 한국사회는 기독교에 기초해야 한다고 평가되어졌다. 그래서 오랫동안 기독교를 믿는 것이 곧 바로 이 민족이 사는 것이라고 생각되어졌다. 경북지방 최초의 기독교회(오른쪽 사진) 대구제일교회(1895년설립)는 그 대표적인 교회이다.

한국기독교 역사학계는 최근까지 기독교가 국가와 민족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상당한 연구업적을 축적해 왔다. 연구 결과 기독교가 청년·교육·의료·사회사업·음악 분야에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현재 한국 기독교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위기에 처해있다. 기독교에 대한 반(反 )기독교적인 정서는 매우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기독교가 기여한 공헌은 무시하고 오히려 부정적으로 묘사하려고 한다. 한국 근대문화를 이끌어 온 기독교는 전통문화, 종교평화, 종교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폄하된다.

기독교가 지역사회에서 활동하는데 공권력이 기독교의 활동에 대해서 어떻게 인식하는가? 하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개항 직후 조선정부는 종교문제에 대해서 ‘계산된 묵인’ 정책을 사용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가 수용될 수 있는 결정적인 요인은 지역사회의 민심이다. 지역 사회에서 기독교는 큰 반감이 없이 수용되었고, 이렇게 되는 데에는 교육과 의료사업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19년대의 안동교회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우선 일본의 국가 종교인 신도(神道)를 한국사회에 이식시키려고 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여기에 순종했지만 강력하게 반대했던 세력이 바로 기독교였다. 일제는 신도의 사당인 신사(神社) 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민의례라고 강변했고, 일제의 강압에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도 굴복했다. 신사참배를 이행하지 않는 기독교 학교, 혹은 교회를 폐쇄시키고 신사참배를 이행하지 않는 성도들에게 핍박과 고통을 주었으며 반대로 신사참배를 이행하는 학교, 교회에는 여러 이권을 줬다.

평양신학교 폐지, 신사참배 반대 교회 폐교, 주기철 목사 등 여러 목회자가 신사참배 반대로 고난을 받고, 성도 2000명이 투옥되었고, 순교자만 50명에 달했다. 1900년대 초에 설립돼 경북 초기 교회가 된 현 금곡교회(용문면 상금곡리)도 신사참배에 반대해 성도들이 일경에 끌려갔다. 그 중 신사참배 반대 주동자인 청년지도자 김상진 선생은 여러 달 투옥돼 갖은 고문 협박과 회유에도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일제 총독부 검찰과 재판정에서 신념을 지켰다(출처 ‘예천군지’)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압축 고속 성장을 한 한국사회에서 개신교의 정치 사회적 의미는 한 마디로 ‘근대화의 기수’ 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 속에 한국인이 신음할 때, 기독교는 ‘또 다른 따뜻한 근대화’ 의 모습을 통해 다음 두 가지 점에서 타종교와 비교할 수 없는 경쟁력을 갖게 되었다. 첫째는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확립하는데 기독교는 이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세력이었다. 둘째는 해방 후 한국 기독교는 세계와의 소통에 필요한 영어권 인재와 민주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지도자를 갖고 있었다. 이런 두 가지 차원의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것이 한국전쟁이다. 전쟁 후 한국기독교는 강력한 민족복음화운동을 벌였고, 동시에 정부는 지역교회와 협력하여 강력한 새마을 운동을 벌였다.

오늘날 교회가 지역사회를 위해 가장 큰 기여는 축복을 빌어주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축복의 의미는 자유와 축복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한 미국 헌법 전문에서도 그 가치를 알 수 있다. 1907년 평양 대 부흥운동 당시 기독교 학교의 설립의 근본 목적은 인본주의적 세계관을 신본주의적 세계관으로 바꾸는 것, 그것은 하나님이 축복하신 “사랑”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을 상실한 인간은 자기 자신 또한 상실하게 된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육체적인 저주와 영적인 저주 아래 놓이게 된다. 인간의 질병과 배고픔, 죽음과 삶 속에서 발생 되는 사람들 간의 충돌, 미움, 분노, 사회적 조정의 문제들은 태초에 일어났던 하나님 상실에서부터 기인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정체성의 회복은 메시아 예수를 통해 성취되었다. 기독교에 대한 기대는 기독교의 정체성인 사랑 운동이 되어야 할 것이다.

경북지역 최초의 기독교회인 대구 제일교회
오늘날 대구경북을 비롯한 한국은 통합보다는 분열, 협력보다는 경쟁, 화합보다는 갈등, 사랑보다는 증오가 만연하고 있어 자유와 축복이 가득한 선진국으로 도약에 장애물이 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근대화라는 역사의 진보를 이끌어온 기독교 정체성의 진수인 사랑(agape)은 기독교를 넘어 이 시대를 치유하는데 필요한 또 하나의 정체성이 아닐까 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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