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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한 수필가

삶이 고되고 힘들 때마다 가끔 ‘나’라는 존재에 의문이 갈 때가 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인간의 지식과 능력의 한계로는 신비에 쌓인 생사(生死)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살아야 포근하고 행복한지를, 술 색깔에 따라 투명하고 맑은 ‘청주’로 비유되는 명상하고 기도하는 성직자나 수도자 삶을 살아야 할지, 또는 텁텁한 ‘막걸리’처럼 풍류를 즐기는 서민의 삶은 어떻고, 달달한 ‘소주’의 보통사람들의 삶은 낭만적일까? 또는 욕망에 불타는 고급 ‘양주’의 삶을 사는 재벌가나 정치인들을 빗대어 보면 계층과 소득에 따라 누가 부럽고, 안 부러운지 분간은 인간은 주어진 환경과 노력한 대가에 따라 다르다

소심한 성격과 덜렁거리는 성격이 있듯이 취미와 적성도 다양하기에 끼리끼리 체질과 소득에 맞게 술 색깔에 따라 어울려 속세의 찌든 피로를 푸는 요지경 세상에 적응해 산다.

그러나, 분명히 인간은 태어나면서 지구 상에 자신의 몫이 있다.

“산 입에 거미줄 치랴?” “저 먹을 복은 제가 가지고 태어난다”는 옛말을 상기하며 자기의 몫을 찾고 역할과 기여를 해야 할 것이다. 청운의 꿈을 품은 패기, 각고의 노력, 각박한 생존 경쟁으로 누구는 앞서고 누구는 처지고 때로는 앞뒤가 수시로 바뀌어 삶의 수준 항상 줄이 세워져 있다.

서열의식에 빠져 남과 비교하면 자극으로 자기발전을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너무 남을 의식하며 집착하다 보면 소신 대로 살아 보지도 못하고 뒤따라가다가 인생을 마감할 때는 때늦은 한탄과 후회를 한다.

인생사를 살펴보면 자신의 몫도 못 챙기는 자가 있는가 하면, 몇백 배, 몇천 배 이상도 자기 몫을 만들어 가는 자도 있다는 것이 총성 없는 생존전쟁의 속세다.

소수의 부자가 수천만, 수억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능력은 별 차이가 없다. 탐욕과 권력의 힘으로 돈이 주머니에 들어가기만 하고 도덕적 의무를 안 하는 오블리스 노블리제 특권층에 편중되고 배분이 막혀 가난과 기아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세상살이는 보이는 몸과 보이지 않는 영혼이 있다고 믿기에 자연 이치에 숙명하고 공을 들이고 덕을 쌓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일요일만 되면 오전에 전 세계 인구 5명 중 1명은 성당이나 교회에서 동시에 미사나 예배드리러 모이는 빨대 현상은 신앙으로 한치 앞 두려운 미래의 마음을 달래는 기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천태만상의 세상사는 갖가지 인간들이 더불어 살아간다. 탐욕과 물질에 중독된 인간이 있는가 하면, 땀 흘려 모은 재물을 나누고 따뜻한 마음을 베푸는 사람들이 있기에 세상이 돌아가고 행복도 공유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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