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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호 호서대 교수 법학박사
대한민국에서 지난 몇 달은 좌파에게는 야망이었고 우파에게는 악몽이었으리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역사적으로는 정치적 자유를 위한 투쟁이었다. 시민이 입법과 집행에 참여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미 민주주의를 달성했다. 그러나 기억하라. 민주주의의 이념을 결정하는 첫째 가치는 자유에 있지 결코 평등이 아니다. 좌파의 정치적 견해는 언제나 해방의 이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해방은 자유,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다양한 종류의 자유이다. 좌파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경제적 억압과 결핍에 투쟁의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회주의를 지향해서는 안 된다. 보수 우파가 부패하고 가치가 전도되었다고 해서 좌파를 지향해서는 안 되는 것과 같다. 현재 우리는 정치적으로 복지국가를 추구하지만, 여전히 빈곤하고, 평화로운 생존을 추구하지만, 곳곳에 폭력이 난무하는 상황이다. 때문에 우리들의 삶은 언제나 위험천만하다. 우리 사회는 인위적 불확실성이 갈수록 증가하여 피해조절과 복구가 어렵게 되었다. 차기 정부는 호혜와 상호의존을 바탕으로 복지문제, 빈곤문제, 그리고 폭력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근대국가에서 형식적 법치주의는 귀족과 시민 두 계층의 사회적·정치적 대립에 가교 역할을 담당했다. 우리는 이제 사회적 통합에 가교를 놓는 실질적 법치주의를 완성해야 한다. 법치주의는 법률의 우위를 설정하고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기도된 하나의 메커니즘이다. 하지만 거대 독점자본주의 사회에서 법치주의의 요청과 그 정당성 근거는 구조적 관련성이 무너져 버렸다. 무능하고 저급한 정치인들이 국회를 이념적으로 할거하여 의회주의적 입법국가로서 기능은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치국가의 윤리적 토대로서의 의미를 가진 법률의 우위나 개인적 자유의 법적 보증이 유명무실화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한 소수자가 다수자에게 정치권력을 행사한다는 민주주의의 전도된 논리는 실로 참기 어렵다. 법치주의가 고양되어 국가도 확실한 인격의 주체로 된다면 국민주권이라는 정당성의 근거가 법적으로 활착될 수 있다. 그러나 촛불집회에서 보았듯이 현실에서 거대한 대중의 에너지가 정치적으로 모이는 상황을 살펴볼 때 이론적으로 법치주의나 국민주권주의의 기능에는 한계가 없다.

원래 법치나 국가의 출발점은 인간 각자가 근원적으로 가진 행복의 욕구이다. 인간의 자연적 권리와 여러 가지 의무란 극히 당연하게도 행복의 욕구에서 도출되는 것이다. 이 욕구는 우리의 위대한 창조주에 의해서 우리 각자에게 부여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행복에의 욕구가 확실히 우리의 생존의 목적이며, 우리의 모든 도덕적 본성의 기초이다. 창조주는 인간에게 욕구를 부여함과 동시에 한편으로 그 행복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다양한 능력과 수단을 주었다. 인간은 모두 본래 자기의 행복을 유지하고 촉진하기 위해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적극적 자격을 가진다. 동시에 이 행복을 방해 또는 저지하는 모든 것을 자제하는 소극적 의무도 가지고 있다.

프랑스 혁명의 진짜 유일한 근본원인은 재정의 무질서, 가중 과세의 가혹한 압박, 궁중의 낭비, 곳곳에 드러난 정실주의, 각자 공민의 인격과 자유 및 재산을 침해하고 무기력한 통치자의 묵인 아래 명예욕과 물욕에 쫓긴 귀족들에 의해서 행해진 전단적인 전제 행위였다. 우리는 폭력의 관리가 필요함을 인정해야 한다. 현대의 서로 다양한 가치들이 서로 연관을 맺으면서 그곳에서 가치의 충돌로 폭력이 발생한다. 개인과 국가 사이에 놓여 있는 시민사회라는 개념은 오늘날 정치 상황에 적용할 때 다소 문제가 있다. 책임은 없고 구호만으로 정부를 농락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중세정신과 같은 절대자에 대한 의존이 아니다. 선거를 통하여 다시 광장의 야만성을 극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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