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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권력과 폭력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제도를 만들어내는 ‘초석적(礎石的) 폭력’이라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만 권력의 근원은 어쩔 수 없이 폭력에 닿아있습니다. 내 의지 하에 타인을 두고자 하는 폭력의 욕망은 인간의 본성에 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도와 법의 옹호를 받는 권력이 때로 순화된 폭력이거나 위장된 폭력의 양상을 띠는 것도 그 탓입니다. 대통령의 권력이 그렇게 자주 법의 징치(懲治)를 받는 것을 보면 폭력(권력남용)의 유혹이 그리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권력집중에서, 제도에서, 그 원인을 찾기도 합니다만 저는 그것을 일종의 책임회피로 여깁니다. 모든 책임은 인간에게 있습니다. 원칙적으로, 제도를 탓하는 자는 스스로 인간의 존엄을 포기하는 자라고 생각합니다. 선거에서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이 바로 후보자의 정직성과 윤리의식, 그리고 결단력과 책임감이 되어야 한다고 제가 주장하는 까닭도 거기에 있습니다. 문제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고르는 것이 유권자의 안목입니다. 유권자들이 눈을 바로 뜨고 바른 사람을 뽑아야 정치에도 ‘군자유종(君子有終)’, 유종의 미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와 관련해서 주역에 볼 만한 내용이 있습니다. 열여덟 번째 괘 ‘산풍고(山風蠱)’, 고(蠱)괘입니다. 경문(經文)은 “고는 크게 형통하고, 큰 내를 건너는 것이 이로우며, 법령에 앞서 사흘을 두며 법령의 뒤에 사흘을 두느니라”(蠱元亨 利涉大川 先甲三日 後甲三日)입니다. ‘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치자(治者)의 처세가 산 아래 부는 바람처럼 순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권력의 근거가 되는 법을 만들 때는 철저하고 단호하게 하지만(先甲三日) 그 법을 시행할 때는 유순하게, 또 공손하게 해야 한다고(後甲三日) 가르칩니다. 지난 몇 년간의 일들을 회고해 보면 참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정치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가장 정치색을 멀리해야 할 국립대학의 장을 임명하는 일에도 ‘유순하고 공손함’이 전혀 없었습니다. ‘산 아래 바람처럼’ 하지 못하고 권력을 마치 폭력처럼 사용했습니다. 그 권력 남용의 결과가 지금 이 지경입니다. 대통령이 파면되고 감옥에 갔습니다. 누구를 탓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 권력을 만든, 유권자인 우리 모두가 반성해야 할 일입니다.

고(蠱)괘의 효사(爻辭) 또한 공교롭습니다. 주로 아비, 어미의 일로 비유를 삼고 있습니다. ‘아비’는 뜻의 계승을, ‘어미’는 행함에 있어 중용의 도를 강조하는 데 주로 사용됩니다. “육오는 아비의 일을 하니 영예로우리라. (六五 幹父之藁 用譽)”라는 대목이 특히 목에 걸립니다. ‘아비의 일’은 덕을 승계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래야 ‘산풍’의 형세를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덕을 승계하여 공손하게 일을 마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수년간은 그러질 못했습니다. ‘선갑삼일, 후갑삼일’을 잊고 오직 권력을 휘두르는 일에만 몰두했었습니다. 이 가르침으로 앞으로의 일에 교훈으로 삼자면, 선거에 이겨 권력을 잡더라도 교만하지 않고 표를 구걸할 때의 마음을 끝내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며, 표를 주지 않은 이들에게 눈을 부라리지 않고 공손하게 일을 마쳐야 한다고 새겨야 할 것입니다. 표를 던지는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함부로 몸을 굴려 세력이 기우는 것에 따라 속보(速步)로 발걸음을 옮겨가며 앞다투어 권력 앞에 줄을 서는 추태는 부리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적어도 아비의 뜻을 계승하려는 자들은 그렇게 해야 합니다. 어디에서든 ‘선갑삼일, 후갑삼일’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아비의 일을 덕으로 승계하고 유(柔)로 가운데 처하며 위력에 맡기지 않는 일, 그것이 권력을 위임하는 자들이나 권력을 위임받는 자들의 변치 않는 도리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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