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잡한 세상사 계곡에 흘려보내고…마침내 자연과 하나되다

▲ 군자정은 자연 암반 위에 세운 2층누각으로 자연미를 살린 소박미가 돋보인다.
군자정은 함양군 화림동 계곡에 있다. 화림동 계곡 초입에 거연정이 있고 거연정에서 100여미터 떨어진 하류에 자리 잡았다. 화림계곡이 있는 서하면 봉전마을은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처가가 있는 곳이다. 정여창은 처가에 올 때 마다 화림동 계곡가 너럭바위 위에서 생각에 잠기거나 놀았는데 그 바위가 ‘유영대’이다. 

정여창 사후 300년 뒤인 1802년 전세걸 세택 형제가 정여창을 기려 유영대 위에 세운 정자다.걸․택형제는 정선 전씨 입향조이며 거연정의 주인인 전시서의 5대손이다. 형제는 정여창이야 말로 조선을 대표하는 군자라고 믿었고 정여창의 학문적 성취와 인덕을 기려 군자정이라 이름했다.

유교에서 군자란 도덕적으로 완성된 인격자를 말한다. 높은 도덕성을 가진 사람을 말하며 선비들의 롤모델이다. 《예기》〈곡례〉편에는 ‘많은 지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겸손하고 선한 행동에 힘쓰면서 게으르지 않은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논어》〈학이〉편에서는 ‘군자는 식사하는데 배부르기를 바라지 않고 거처하는데는 편안하기를 바라지 않고 일에 민첩하며 말에 조심스럽고 인격을 갖춘 사람에게 나아가 자신을 바로잡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군자정 정명은 정여창의 맑고 고결하고 향기로운 선비정신을 담아내기 위해 지었다
군자는 연꽃에 비유되기도 한다. ‘진흙에서 나와 오염되지 않고 맑은 물에 씻기어도 요염하지 않으며 가운데는 통하며 밖은 곧고 덩굴 뻗지 않고 가지치지 않으며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고 우뚝이 깨끗하게 서 있으며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으되 함부로 가지고 놀 수는 없다’ 송나라 주돈이의 시 ‘애련설愛蓮說’에 나오는 싯구다. 정여창의 맑고 향기롭고 고귀한 선비 정신을 닮고 배우는 한편 세속에 휩쓸리지 않고 의연하게 자연과 더불어 살겠다는 의미이다.

정작 정여창의 삶은 그리 녹녹하지 않았다. 세파에 흔들리며 삶의 뿌리가 통째로 뽑혔다. 김굉필 남효온 김일손과 함께 김종직의 제자였던 정여창은 고향인 안의에서 안의현감을 지내던 중 갑자사화에 연루돼 곤장 100대에 천리 밖 유배의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국토의 최북단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를 떠났다. 그는 종성으로 가던 중 안령에서 암담한 심정을 ‘안령에서 바람을 기다리며’라는 시로 노래했다.

큰 바람 있으련만 바람오지 않고 大風風不至
뜬 구름이 푸른 하늘을 가리었네 浮雲蔽靑天
어느 날 서늘한 바람 일어나 何日凉飄發
여러 그늘을 쓸어내고 다시 하늘을 보리 掃却郡陰更見天

군자정은 일두 정여창이 즐겨찾은 유영대 바위 위에 전세걸 세택 형제가 지은 정자다.
바람을 기다리는 그의 희망은 물거품이 됐다. 큰 바람은 불지 않았고 여러 그늘을 쓸어내지 못했으며 아울러 다시 하늘을 보지도 못했다. 유배지에서의 삶은 고달팠다. 연산군은 수모를 주기 위해 정여창에게 ‘정로한庭爐干의 역’을 부과했다. 관청 정원의 관솔불을 피우는 화부의 노역이다. 보다못한 관원들이 화부 노역에서 빼주겠다고 했으나 정여창은 성실히 화부노릇을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배움을 청하는 제자들을 받아들였다. 

이희증과 고숭걸 같은 인물이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이 때문에 그는 종성땅에서도 서원에 배향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간난신고(艱難辛苦) 속에서도 정여창은 학문 연구에 매진했고 제자들을 가르쳐 사림의 씨를 뿌리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9년 기한의 유배 생활을 다 채우지 못하고 그는 갔다. 유배를 떠난 지 7년 만에 5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불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정여창은 세상을 떠났던 그해에 부관참시까지 당했다. 3년 동안 세자시강원설서로 연산군의 공부를 담당했던 그는 공부를 놓고 연산군과 갈등을 빚었다. 그게 악연이었다. 악연을 피해 안의현감을 자원했던 그는 결국 사화의 그물망을 벗어나지 못하고 유배에 이어 죽어서 까지 칼을 맞는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군자정 안에서 본 계곡. 별을 흩어놓은 듯한 바위 사이를 계곡물이 호호탕탕 흘러간다
그러나 그의 학문과 실천적 유교사상은 후학에게 크게 영향을 미쳐 김굉필 이언적 조광조 이황과 함께 ‘동방5현’으로 추앙받게 됐다. 함양을 안동과 함께 영남사림의 대표적 지역으로 꼽는 데는 정여창이 있기 때문이다.

정여창의 호 ‘일두’는 ‘한 마리 좀벌레’라는 뜻이다. 성리학의 태두인 정이천(程伊川)의 ‘하늘과 땅 사이 한 마리 좀벌레 天地間一蠹’ 싯구에서 따왔다. “농부는 무더위와 한겨울에 열심히 경작하여 내가 이 곡식을 먹고, 공인이 어렵게 기물을 만들어 내가 이를 사용하고, 군인이 갑옷을 입고 병기를 들고 지켜 내가 편안히 지낼 수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 은택을 주지 못하고 그럭저럭 세월만 보낸다면 ‘하늘과 땅 사이의 한 마리 좀벌레’에 불과하다”

사람이 태어날 때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세상에 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름도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정해진다. 반면 자기가 짓는 호는 자신 생각이나 철학, 의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정여창이 자신의 호를 ‘한마리 좀벌레’라고 한 것은 나태해지고 용렬해지는 자신을 호되게 몰아 부치기 위해서다. 더 많은 수양과 더 높은 단계의 공부에 매진해야 한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정여창이 23살이 되던 해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부임해왔다. 조선 성리학의 정통계보는 정몽주 길재 김숙자로 이어진다. 김종직은 김숙자의 아들이다. 정여창은 김굉필과 함께 김종직의 문하로 들어간다. 절의와 기개를 제일의 가치로 여기는 공부를 하면서 그때 쯤 부족한 자신을 채찍질 하기 위해 호를 ‘일두’라고 지었다. 

송래희의 군자정 시판
김종직이 서울로 올라가자 정여창은 홀로 지리산에 들어가 3년을 사서삼경 등을 팠다. 27살에 서울로 올라가 옥당의 응교로 있던 김종직을 다시 찾아가 정자와 주자를 배웠다. 그의 효행과 학문을 높이 사 여러차례 벼슬자리에 천거됐으나 사양하다가 33세에(1482년 성종 13년) 전주부사를 지낸 뒤 41세가 되던 해 별시 문과에 합격해 예문관 검열이 되기 전까지 경남 하동의 악양에 머물면서 학문을 강의하고 토론하면서 지냈다.

▲ 글 사진 /김동완 여행작가
정여창이 군자정이 있던 유영대를 집중적으로 찾은 시기는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에 사는 도평군(정종대왕 후손)의 막내딸과 결혼한 16세때부터 23살에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기 전쯤인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에는 안의현감을 지낼 때를 제외하고는 공부와 관직을 거치면서 그렇게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정자 내부에는 김선익이 쓴 ‘군자정 중수기’와 송래희 윤수익 정계춘이 쓴 시판이 걸려 있다. 정자 앞 계곡에는 울퉁불퉁한 바위가 쏟아져 내려있고 그 곁을 스치고 지나는 물소리는 호호탕탕 장쾌하다. 계곡 건너편 절벽에 있는 바위가 영귀대詠歸臺다. 절벽에 ‘영귀대’라고 새긴 뒤 붉은 물감을 넣어 눈에 띈다. 군자정 안에서 보는 영귀대나 영귀대에서 보는 군자정이 서로 경물이 된다.

지팡이에 의지하고 차가운 물에 임하니
옷깃을 헤치고 늦은 바람 씌우네
서로 만난 좋은 군자들은
헛되이 고기 잡는 늙은 이라 이르더니라
수사의 정맥이요 염락의 준적이라
유요는 만번 변하지만
성인의 한마디 말씀 내몸에 있어
지게를 열어 갖추었으니
도는 경옥을 통하여 만고에 떨쳤도다

전세걸의 시 ‘주부자군자정시’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다. 암반 위에 세운 중층 누각 건물로 홑처마 팔작지붕집이다. 기둥은 모두 원주를 사용하였고 주춧돌은 사용하지 않았다. 판재로 만든 계단을 두어 정자로 오르게 되어 있으며 4면 모두 기둥의 바깥쪽으로 약 15~18cm 정도를 연장하여 계자난간을 둘렀다. 바닥은 장마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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