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육은 항상 파고드는 자라, 바르더라도 흉하여 이로울 바가 없느니라. (初六 浚恒貞凶无攸利) - 항괘의 처음에서 가장 괘의 밑에 처해 있으니 처음부터 깊이 구하는 자이다. 깊이 파고들어 밑바닥까지 다해서 사물로 하여금 남는 게 없게 하니, 점점 이에 이르러도 사물이 견디지 못하거늘 하물며 처음부터 깊이 파고드는 자랴! 이로써 항(恒)을 삼으면 바르더라도 흉하게 되고 덕을 해치게 되어 베풀어도 이로움이 없다. ‘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주역 서른두 번째 괘 ‘뇌풍항’(雷風恒), 항괘(恒卦)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초육(初六)에 대한 효사입니다. 육효(六爻) 중에서 가장 아래에 있는 음효(陰爻)에 대한 설명입니다. ‘바르더라도 흉하여 이로울 바가 없다’는 말씀이 흉금을 울립니다. 우리는 바르면 다 좋은 줄 압니다. 그러나 ‘지구 상에는 직선이 없다(땅은 울퉁불퉁하기 때문에)’라는 말이 참이라면 ‘지구 상에는 바름이 없다(상대적이기 때문에)’라는 말도 참입니다. 누구에게나 행복을 주는 ‘바른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굳이 ‘덕(德)’을 끌어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제가 자주 하는 말 중에 ‘군자(君子)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나치게 이상화 되어 있는 인간형이라는 뜻입니다. 본디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종교가 있고, 법이 있고, 예술이 있는 까닭도 바로 그 인간의 불완전성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 ‘인간의 실존’ 앞에서 ‘처음부터 깊이 구하는’ 일은 어쩌면 인간에 대한 공격이고 파괴일 수 있습니다. 어디서든 하나만을 고집하는 것은 흉하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만약 그 흉한 일을 반겨 맞고 싶다면 내 안에 어떤 큰 결핍이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대선 정국이 점점 과열되고 있습니다. 상대의 흠집을 찾아 ‘깊이 파고드는 것’이 자주 목격됩니다. 설혹 그것이 바르더라도 이로울 바가 없으면 결국 악(惡)일 뿐입니다. 선거는 결국 차선(次善), 차악(次惡)을 고르는 일입니다. 해결사를 찾는 것만이 능사가 아닐 것입니다. 유권자 스스로 사랑으로 분열을 치유하겠다는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