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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최근의 ‘국정 농단’ 사건을 보고 난 후의 소감입니다. 모든 비리 사건의 주역들은 결국 해결사들입니다. 누구에겐가 꼭 필요한 것을 줄 수 있는 자이고 사통팔달, 막혀 있는 관계망을 시원하게 뚫는 힘을 가진 자들입니다. 문제는 그 해결의 목적과 과정이 법을 무시하거나 그것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데 있습니다. 법은 공평과 공정을 그 생명으로 하는데 법의 존재 의의를 아예 무시해버리는 것이 바로 그들 해결사입니다. 그것이 그들이 법의 치죄(治罪)를 받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한 나라를 ‘굴리는’ 차원은 아니더라도 해결사들은 우리 사회 곳곳에 존재합니다. 사업이나 직장 생활을 수십 년 하다 보면 그런 사람들을 심심찮게 만납니다. 좋은 관계 속에서 만날 때도 있고 좋지 않은 관계 속에서 만날 때도 있습니다. 좋은 관계 속에서 그런 능력자를 만나면 마치 세상을 다 얻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저 같이 있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천지가 화평합니다. 무슨 고민이든 그에게 부탁하면 쉽게 해결됩니다. 그런데 그런 밀월 관계가 아니면 그와 함께하는 모든 일이 불편합니다. 그들은 동지 아니면 적이라는 단순명쾌한 관계망을 선호하기 때문에 중도(中道)는 일절 인정하지 않습니다. 중간에 있으면 회색분자, 기회주의자, 첩자로 간주합니다. 부득불 그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변 정리도 자주 해야 합니다. 언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공공의 적이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처음부터 깊이 구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보통은 쉽게 알 수 있지만, 개중에는 그것마저도 교묘히 감추고 있는 경우도 있어 후일 크게 후회할 일을 남기게도 합니다. 주역에 그들 ‘처음부터 깊이 구하는 자들’과 관련된 교훈이 있어 옮겨 봅니다.

초육은 항상 파고드는 자라, 바르더라도 흉하여 이로울 바가 없느니라. (初六 浚恒貞凶无攸利) - 항괘의 처음에서 가장 괘의 밑에 처해 있으니 처음부터 깊이 구하는 자이다. 깊이 파고들어 밑바닥까지 다해서 사물로 하여금 남는 게 없게 하니, 점점 이에 이르러도 사물이 견디지 못하거늘 하물며 처음부터 깊이 파고드는 자랴! 이로써 항(恒)을 삼으면 바르더라도 흉하게 되고 덕을 해치게 되어 베풀어도 이로움이 없다. ‘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주역 서른두 번째 괘 ‘뇌풍항’(雷風恒), 항괘(恒卦)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초육(初六)에 대한 효사입니다. 육효(六爻) 중에서 가장 아래에 있는 음효(陰爻)에 대한 설명입니다. ‘바르더라도 흉하여 이로울 바가 없다’는 말씀이 흉금을 울립니다. 우리는 바르면 다 좋은 줄 압니다. 그러나 ‘지구 상에는 직선이 없다(땅은 울퉁불퉁하기 때문에)’라는 말이 참이라면 ‘지구 상에는 바름이 없다(상대적이기 때문에)’라는 말도 참입니다. 누구에게나 행복을 주는 ‘바른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굳이 ‘덕(德)’을 끌어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제가 자주 하는 말 중에 ‘군자(君子)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나치게 이상화 되어 있는 인간형이라는 뜻입니다. 본디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종교가 있고, 법이 있고, 예술이 있는 까닭도 바로 그 인간의 불완전성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 ‘인간의 실존’ 앞에서 ‘처음부터 깊이 구하는’ 일은 어쩌면 인간에 대한 공격이고 파괴일 수 있습니다. 어디서든 하나만을 고집하는 것은 흉하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만약 그 흉한 일을 반겨 맞고 싶다면 내 안에 어떤 큰 결핍이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대선 정국이 점점 과열되고 있습니다. 상대의 흠집을 찾아 ‘깊이 파고드는 것’이 자주 목격됩니다. 설혹 그것이 바르더라도 이로울 바가 없으면 결국 악(惡)일 뿐입니다. 선거는 결국 차선(次善), 차악(次惡)을 고르는 일입니다. 해결사를 찾는 것만이 능사가 아닐 것입니다. 유권자 스스로 사랑으로 분열을 치유하겠다는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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