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형성과 유통, 그 중심에 ‘전쟁’이 있었다. ‘전쟁의 문헌학’(김시덕·열린책들).

일본 고문헌 연구자로 탄탄한 입지를 쌓고 있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김시덕 교수의 신간이다.

30년 넘는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일본 고전 문학 학술상’을 외국인 최초로 수상해 화제가 된 전작 ‘이국 정벌 전기의 세계’(2010, 가마사쇼인), 한국어판은 ‘일본의 대외 전쟁’(2016, 열린책들) 에 이은 두 번째 연구서로 문헌 연구의 시기가 15세기에서 근대기까지, 그 범위가 동북아 전체와 유럽에까지 확장되고 있음이 주목된다.

김 교수는 문헌학자로서 특히 ‘전쟁’에 관심이 많다. 그는 전쟁이 ‘비정상적이고 발작적인 현상’이라는 명제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쟁이 정상이며, ‘전쟁과 전쟁 사이에 휴지기로서 평화가 존재’한다고 본다.

일견 전쟁 옹호론으로 읽힐 수 있겠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즉, 평화는 자연히 유지되지 않으며 전쟁을 막기 위해 비상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홀로코스트를 연구하는 것이 히틀러의 부활을 위한 것이 아니듯, 그는 전쟁 문헌 연구를 통해 평화에 기여하고자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김 교수는 전쟁의 기억이 담긴 문헌을 추적해 왔다. 전작에서 전근대 동아시아 각국이 전쟁을 기억하는 방식에 주목했던 그는 신간 ‘전쟁의 문헌학’에서 전쟁이 문헌의 형성과 유통에 미친 막대한 영향력을 분석한다. 서문에서 김 교수는 ‘상대국의 문헌과 정보가 수집되고 담론이 형성된 주요한 원동력은 상대국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이나 우호적 감정이’아니고, ‘이 지역에서 과거에 발생했던 전쟁,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것이 예상되는 전쟁에 대한 경계와 준비, 즉 무비(武備)가 그 근원에 있다’고 주장한다.

작가 김시덕
즉 이 책은 동북 아시아 지역에서 발생한 대규모 국제 전쟁이 활발한 문헌 형성과 유통을 촉발시켰고, 이렇게 형성된 문헌(지식)이 또 다른 전쟁을 발생시키는 단초가 되었음을 밝히고 그 메커니즘을 추적한다.

임진왜란 이후 상대국의 문헌(지식)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국가는 한·중·일 삼국 중 일본이었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문헌의 형성과 유통을 분석하는 중심축 또한 일본이다.

저자는 먼저 조선과 중국의 문헌들이 일본으로 전해서 수용된 양상을 분석한다. 특히 중요한 분석 대상은 조선의 ‘동국통감’이다. 1485년 서거정 등이 편찬한 ‘동국통감’은 ‘삼국사기’와 함께 일본에서 가장 널리 읽힌 조선 역사서로, 임진왜란 당시 판목이 약탈돼 일본에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최초의 유학자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1561~1619)가 제자 하야시 라잔(林羅山, 1583~1657)에게 ‘동국통감’을 빌려 보기를 청한 사연이 유명하다. ‘동국통감’은 에도 일본의 한국사 교과서라 할 만한 ‘신간동국통감’의 저본이 되는데, 1667년에 이를 편찬한 이가 바로 하야시 라잔의 아들 하야시 가호(林.峰, 1618~1680)이다. 이렇듯 ‘동국통감’은 일본 내 한국사 연구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점하게 됐다. 가호가 편찬한 ‘신간동국통감’의 판목이 조선에 전해지게 된 사연 또한 흥미로운데, 919년 제2대 조선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1850~1924)가 ‘신간동국통감’의 판목을 총독부에 기증함으로써 조선-일본-조선의 전래 주기가 완성된다.

그간 존재를 확인할 수 없었던 이 판목을 2014년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발견해 학계에 보고한 바 있는 저자는 그간의 연구를 종합해 한일 간 문헌 교류의 한 흐름을 조명한다.


곽성일 기자
곽성일 기자 kwak@kyongbuk.com

행정사회부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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