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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영화를 보는 재미 중 하나가 ‘한 말씀’ 듣는 일입니다. 장면도 좋고 스토리도 좋지만, 뜻밖의 한 마디가 크게 심금을 울리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 대사들은 입소문을 타고 마치 만능키처럼 우리 사회 이곳저곳의 막힌 곳을 뚫어주고 다닙니다. 유명한 것 몇 개만 들자면, “니가 가라, 하와이”(친구), “뭐시 중한디?”(곡성), “어차피 대중은 개, 돼지입니다”(내부자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나?”(베테랑) 같은 것들이 있겠습니다. 모두 시절 인연이 있는 것들입니다. 각기 유행하는 계기가 다르고 사용되는 맥락이 다릅니다. 대강이나마 그 계열을 살펴보면 흥미롭고 새로운 정보를 전달하는 것, 삶의 목적과 관련된 집단적 반성을 촉구하는 것, 사회적 해방감과 관련된 것 등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이른바 기술적 관심, 실천적 관심, 해방적 관심에 부응하는 것들이겠습니다. “니가 가라, 하와이”는 기술적 관심, “뭐시 중한디...?”는 실천적 관심, “어차피 대중은 개, 돼지입니다”와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나?”는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해방적 관심에 연결된다고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버마스식으로 ‘억지로’ 붙여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 걸 몰라도 충분히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를 재미있게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 유명한 대사들의 공통점은 그것들이 영화의 메시지를 ‘한 줄로 요약’한다는 것입니다. 작가(감독)가 의도한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겠습니다만, 전체 영화의 의도와 효과가 이 ‘대표 대사’ 한마디에 의해서 그 최대치에 이르게 됩니다. 관객의 뇌리에 깊이 각인됩니다. 명대사 한 마디가 영화 전체와 맞먹는 비중과 가치를 지니는 것입니다.

크게 유행한 대사는 아닙니다만 최근에 저에게 큰 울림을 준 영화 대사는 “나이가 들어서는 규칙을 위해서 죽는다”(일대종사)와 “지금 (사랑을) 만나러 갑니다”(지금 만나러 갑니다)였습니다. 무협과 멜로라는 전혀 다른 장르의 영화였지만 제게는 둘 다 꼭 필요한 윤리 교과서로 읽혔습니다. 저의 기술적, 실천적, 해방적 관심에 골고루 응답을 주는 영화들이었습니다(이 글을 쓰고 있는데 TV에서 ‘지금 만나러 갑니다’가 우리나라 영화로 다시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전하는군요). 나이 들어서는 “규칙을 위해서 죽는다”라는 말을, 하등의 망설임도 없이, 그저 자연스럽게, 내뱉을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자기를 버리고 사랑을 만나는 일에 항상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늙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신의 이득과 세대의 존재감을 위해 시대착오적인 ‘질서(秩序)’를 무턱대고 고수하려는 것은 어른들의 ‘규칙 지키기’가 아닙니다. 아무리 실존적, 역사적 상처가 크다고 하더라도 그런 묵수(墨守·묵자가 성을 굳게 지켰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 제 의견이나 생각 또는 옛 습관을 굳게 지킴)는 존중받을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모를 때부터 약육강식의 정글로 내몰렸던 것이 우리 전후 출생 세대, 베이비붐 세대들입니다. 생존 경쟁의 ‘무한 도전’을 생활의 미덕으로 알고 자랐습니다. 돈도 악착같이 벌었고, 운동도 목숨을 걸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선한 목적도 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산업화의 역군이든 민주화의 선봉이든 이제는 시절 인연과의 작별을 도모해야 할 때입니다. 야만의 시대를 개명(開明·사람의 지혜가 열리고 문화가 발달함)의 세상으로 인도한 것으로 이제 우리의 소임은 끝이 났습니다. 오직 우리 안에 남은 야만을 밖으로 내몰 일만 남았습니다. 미래는 미래를 담당할 이들에게 맡겨야 합니다.

역사가 강요한 야만을 벗어나는 길은 스스로 윤리 교과서를 끊임없이 외우는 길밖에 없습니다. 오직 각자도생(各自圖生·제각기 살 길을 도모함)입니다. 그 노력을 한시라도 게을리하면 순식간에 짐승으로 떨어집니다. 나이 들면 사랑과 규칙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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