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산 문필봉 기운 받아 안동 인재의 절반 배출한 학자마을

안동에서 34번 국도를 타고 영덕 방향으로 가다 보면 임하댐 수곡 단지가 나온다. 이곳이 임하댐 건설로 인해 1989년 신 단지를 조성해 이주한 임동면 소재지 중평이다. 수몰 전 중평은 챗거리라 불렀다. 옛날 동해안의 해산물과 내륙의 산물들을 거래하는 큰 장터가 있어, 이 장터에 우마에 채찍질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아 챗거리라 불려졌다.

안동의 읍지인 영가지(永嘉誌)에 임동면은 ‘본디 고구려의 굴화군(屈火郡)이다. 신라 경덕왕이 곡성군(曲城郡)으로 고쳤는데 고려 초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 때에 본부(本府)에 예속됐다” 라고 기록돼 있다

근대 들어 1974년 안동댐 준공으로 마리 등 6개 리가 편입되면서 13개 리가 됐다가 1993년 임하댐 건설로 지례리와 수곡리의 일부가 폐지되고 1995년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 임동면으로 개칭됐다. 현재 12개 법정리와 20개 행정리로 구성돼 있다.

임동 중평리
△전주(무실) 류씨

경북에서 인재가 많이 배출된 집안 세 곳을 꼽는다면 영양 주실 조씨 시인 조지훈 집안, 안동 임동 지례의 의성김씨 포항공대 총장을 지낸 김호길 박사 집안 그리고 안동 임동 박실의 전주류씨 시인 류안진 집안이다.

무실, 박실, 한들, 마재, 고래골과 예안 삼산 마을 일대에 세거하는 전주 류씨를 안동 일대에서는 ‘무실 류씨’ 라고 부른다.

무실 마을 입향조는 류성(柳城·1533-1560)이다. 그의 아들 류복기·복립 두 형제는 임하면 내앞마을 청계 김진의 외손으로 일찍이 부모를 잃고 외가에서 양육된다. 커서는 외숙부인 학봉 김성일에게 수학해 문장과 덕행으로 향리에서 존경받는다. 임란을 맞아 두 형제는 팔공산, 화왕산성, 진주성 전투 등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 집안은 영남에서 문집(文集)을 가장 많이 낸 집안으로 유명하다. 16세기 중반부터 지금까지 95명이 900여 권의 문집을 냈다. 그만큼 학자가 많이 배출됐다는 징표이기도 하다.

근래에도 이 집안 출신 교수와 학자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다. 충남대 류정기 교수를 비롯해 서울대 류안진 교수, 우파 논객으로 유명한 연세대 류석춘 교수, 이화여대 류철균 교수 등이 ‘무실 류씨’다.

이렇듯 많은 학자가 배출된 배경에는 임동면 수곡동에 아기산(鵝岐山)이라는 유명한 문필봉이 있다.

450여 년 전 아기산이 바라다보이는 자리에 무실 류씨 입향조인 류성의 묘를 쓰면서부터 학자들이 배출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이곳은 류성의 장인인 김진이 쓰려고 잡아 놓은 자리였다고 한다. 그런데 사위가 먼저 죽자 이를 애석하게 여긴 김진이 그 자리를 내준 것이다. 김진은 안동에서 직언을 잘하기로 유명한 의성 김씨 집안의 중시조이며, 그의 아들 5명이 과거에 모두 합격해 ‘오룡지가’로 불리던 집안이다.

무실 류씨들은 명당자리를 선뜻 내준 의성 김씨에게 1581년부터 지금까지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매년 청계의 제삿날에 커다란 대구포를 보내오고 있다.

임하댐 건설로 수몰이 되자 일부 고지대로 이건 하기도 했지만, 구미 선산군 해평면 일선리로 집단 이주해 문중 결속력을 과시하고 있다.

임하댐 건설 전 임동면
△ 3대가 독립운동에 뛰어든 정재 종가

대곡천을 사이에 두고 무실과 마주보고 있는 수곡2동 한들(大坪)은 퇴계의 정맥을 이은 정재 류치명(1777~1861)을 배출한 마을이다.

이 마을에서 외침에 맞서기 시작한 때는 류치명의 아들 류지호(1825~1904)부터다. 그를 이어 손자 류연박(1844~1925)과 류연성(1857~1919), 증손자 류동시(1886~1961)와 류동저(1892~1948)로 이어지는 3대가 독립운동에 나섰다.

특히 나라를 잃은 뒤 협동학교 주역들이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만주로 이동하자, 협동학교를 도맡은 사람들이 바로 무실마을 정재 종가였다.

임동 챗거리시장에서 벌어진 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의 계기를 만든 사람이 류동시 이고, 그것을 꽃 피운 사람이 류연성이었다. 특히 류연성의 활약은 임동 만세운동이 전국에서도 보기 힘들 만큼 강한 투쟁을 이끌어냈다.

같은 무렵에 류연박은 ’파리장서’에 참가했다. 이는 파리에서 열리는 강화회의에 유림들이 나서서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독립청원서’를 보낸 것이다. 이후 1920년대에는 류연박의 둘째 아들 류동저가 청년운동과 사회운동을 통해 대를 이었다.

김희곤 안동대 교수는 “정재 종가의 독립운동은 전통적인 유림 집안이 대를 이어가며 민족문제에 맞서 나간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고 말했다.

△ 형제 대학 총장 배출한 지례 마을

임동 지례 마을은 임하댐이 생기기 전에는 임동면 지례리에 속했으나 지금은 박곡리이다. 오래전 류안진 시인의 ‘바람꽃은 시들지 않는다’라는 드라마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의성김씨 집성촌인 이 마을은 포항공대 초대총장을 지낸 ‘김호길 박사’와 그의 동생 한동대 총장을 지낸 ‘김영길 박사’ 형제가 태어난 곳이다.

세계적인 물리학의 석학인 무은재 김호길 박사는 물리학뿐만 아니라 항상 퇴계 선생의 문집을 책상머리에 둘 정도로 실천유학에 밝고 또한 그것을 신념으로 교육에 몰입했다. 그는 ‘박약회’를 조직하고 초대 회장직을 맡아 헌신하기도 했다.

그의 동생 김영길 박사는 미국 저명과학자 인명사전인 ‘미국의 과학자’에 한국인 최초로 수록됐다. 특허만 20여 개다. KAIST 재료공학과 교수와 UCLA 교환교수를 역임한 뒤 한동대 총장으로 재직했다.

포항에 있는 두 명문대학의 초대총장을 지낸 두 형제는 모두 과학의 길을 걸어왔으나 과학자의 틀을 벗어난 남다른 안목으로 교육계에서 성공적인 업적을 남겼다.

최근 작고한 ‘성탄제’,‘설날 아침에’ 등을 남긴 김종길 시인도 임동 지례 출신이다. 원로 시인이자 학자로 평생을 문단과 학계에 치적을 남긴 그는 임동에서 천전 앞을 흐르는 반변천을 천수통(川水通)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 임동 출신 인물들

안동에는 수많은 인재들이 배출됐다. 조선의 인물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물의 반은 안동에 있다는 말까지 생겨났다. 안동 임동면에도 수많은 인재가 배출됐다. ‘안동 인재의 반은 임동’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재경 대구·경북시도민회장을 맡고 있는 류목기 풍산그룹 상근고문이 박곡 출신이다. 재경 안동향우회 7대 회장을 역임한 류 회장은 고향 안동을 위해 수많은 기여를 했다. 지금은 류필휴 경수제철 대표이사가 안동향우회를 이끌고 있다.

이희범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도 임동 출신이다. 그의 동생 이희재 교수는 안동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학계에는 류안진 서울대 교수, 김종길 고려대 명예교수를 비롯해 류정기 교수, 류탁일 교수, 류창균 교수, 김상돈 교수 등이 있다.

류혁인 전 공보처장관은 박실 출신으로 3공화국 시절 청와대 공보수석을 지냈다. 연세대 류석춘 교수, 서강대 류석진 교수는 그의 자제이다.

이밖에 산자부 차관 출신인 김종갑 한국지멘스 대표이사, 류필계 LG유플러스 부회장, 김종탁 전 산림청장, 문상부 전 중앙선관위 상임위원, 류성걸 전 국회의원, 류승번 전 국회의원, 이상철 예비역 소장, 류영민 전 총무처 국장, 이영화 전 대전지방경찰청장, 류석호 전 조선일보 기자, 이미자 ‘저강은 알고 있다’의 작사가 류동일, 외교부 류강석 대사. 류성걸 영사. 윤병진 세계탈연맹 사무총장, 김병우 고양경찰서장, 손호영 경북축구협회장, 서상출 농협중앙회 대구본부장, 류희걸 초대 안동민속박물관장 등이 임동 출신이다.


오종명 기자
오종명 기자 ojm2171@kyongbuk.com

안동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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