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 트인 물길 빼어난 절경에 세월도 잠시 쉬어가네
화림동 계곡은 계곡이 시작되는 거연정, 군자정을 지나면서 옥녀담에 이르러 수백평 규모의 넓직한 암반이 펼쳐보이는데 차일암(遮日巖)이다. ‘차일’은 세월을 막는다는 뜻이다. ‘지나가는 것이 이 물과 같구나, 밤낮없이 그치지 않는구나.”공자는 이렇게 세월의 무상함을 탄식했다. 천상탄(川上嘆)이다. 차일은 공자의 탄식보다 훨씬 공격적이다. 탄식할게 아니라 아예 오는 세월을 막겠다고 바위이름을 지었다.그러나 세월은 막는다고 막아지는 게 아니다. 바위 이름을 지은 이가 더 잘 알고 있다. 오히려 세월의 덧없음, 인간 존재의 나약함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반어법 일지도 모르겠다.
이름난 곳을 찾아 얻고 새롭게 집을 지었네
돌과 샘에 인연있어 재빨리 착수하고
구름과 수풀에 욕됨이 없이 가히 이몸을 마칠가 하네
낚시대에 도롱이 입고 안개비 맞으며 보니
절벽에 핀 복사꽃은 옥동의 봄이로구나
바위굴에 있는 원학과 친구되기를 허락하니
성스럽고 밝은 세상에 오직 한가한 사람이라네
- 장만리의 시 ‘초현에 엎드려 살다’
홀로 바위에 와서 앉으니
산은 고요한데 흰구름만 짙어가네
물은 꽉차서 넘쳐나는데
참된 근원은 이 가운데 있도다
망천의 냇가에 별업을 열었고
기산이 묏뿌리에 남은 풍치 우러르네
한곡조 풀의 노래가 그치니
곧 신선을 만나겠구나
- 장만리의 시 ‘차일암에서 노닐며’
동호정 안의 단청은 화려하기 그지 없다. 대들보로 사용한 소나무는 거의 아름드리인데 굽은 그대로 사용했다. 대들보 위의 충량에는 용의 대가리가 조각됐다. 좌우 충량에는 청룡과 황룡을 조각했는데 황룡은 물고기를 물고 있고 청룡은 여의주를 물고 있다. 함양의 용추계곡에 있는 심원정에도 이와 같은 조각이 있다.
이밖에 천정에는 커다란 화반을 조각하고 만개한 국화꽃을 그려놓았다. 조선의 선비들이 가장 좋아한 시인은 도연명인데 도연명은 특히 국화를 좋아했다. 그의 연작시 ‘음주’ 중 ‘동쪽 울타리에서 국화를 따며 멀리 아득히 남산을 바라보네彩菊東籬下 悠然見南山‘라는 싯구는 선비들의 애송시였다. 국화의 계절인 가을에 편지를 쓸 때는 꼭 ‘채국동리하지절에 가내 두루 평안하신지요’라며 첫머리를 장식했다. 정자 안에는 중수기과 상량문 시판 상량문 등의 현판이 걸려있는데 정연갑이 쓴 상량문에 정자의 건축에 이르게 된 배경과 건축 당시 풍경이 자세히 나와있다.
특히 정자에서 눈길을 끄는 현판은 공자의 일대기를 그린 화판이다. 공자의 탄생과 강학 장면, 사망장면까지 세세하게 그려져 있다. 공자의 강학장면을 그린 화판은 남계서원의 강학당이 명성당에도 걸려 있는데 정자가 단순히 놀고 마시는 유흥의 공간이 아니라 학문을 갈고 닦는 장소임을 역설하는 메시지일지도 모르겠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