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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병일 영남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사람은 살아서는 주택에서 거주하고, 죽어서는 묘지에 안장된다.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풍수론에 입각한 명당론이 유행하였다. 풍수설이 언제부터 유행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고려시대 묘청의 서경천도론도 풍수설에 근거한 것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시중에 많이 남아있는 조선시대 소송서류인 소지 등을 살펴보면, 산에 대한 소송인 산송의 대부분이 명당론이 뒷받침된 묘지 관련 소송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음택론이 조선시대에도 유행한 것이 분명하다. 조선시대 경국대전에서도 묘지에 관한 규정이 있을 정도로 장묘는 우리나라 역사상 매우 중요한 사회적 문제이었다. 일제도 침략 초기인 1912년에 묘지, 화장장, 매장 및 화장 단속규칙을 제정하여 종래 유행하던 노장, 덕장 등의 풍습을 제한하면서 공동묘지를 강행하였지만, 우리 민족의 엄청난 반발에 부딪혀서 1919년 묘지단속규칙을 개정하여 사설묘지도 허용하였다. 그런데 종래 대법원은 묘지에 관한 독특한 법리를 분묘기지권이라는 이름으로 선언해왔다. 첫째 오랫동안 다른 사람 소유의 토지에 그 소유자의 승낙을 받아 분묘를 설치한 경우 분묘기지권을 취득하고, 둘째 분묘를 설치한 사람이 토지를 양도한 경우에 분묘를 이장하겠다는 특약을 하지 않는 한 분묘기지권을 취득하고, 셋째 다른 사람 소유의 토지에 그 소유자의 승낙 없이 분묘를 설치한 경우에도 20년간 평온, 공연하게 그 분묘의 기지를 점유하면 지상권과 유사한 관습상의 물권인 분묘기지권을 시효로 취득한다고 판시하여 왔다. 이러한 세 종류의 분묘기지권을 취득한 묘지 소유자는 그 묘가 있는 토지의 소유자에 대하여 그 묘가 소재하는 토지에 대한 사용권을 가지게 된다. 이로 인하여 토지 소유자는 토지의 소유권을 가지고 행사할 수도 있지만, 그 묘가 소재한 토지의 사용권은 행사할 수 없게 된다. 이 분묘기지권이 관습법상 확립된 것은 일제 당시 우리나라 최고법원이었던 조선고등법원이 선고한 1927년 판결에 의해서 이루어졌는데, 그 당시 일제는 이와 같은 분묘기지권의 관습이 조선의 관습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셋째 분묘기지권으로 다른 사람의 토지에 그 소유자의 승낙이 없이 무단으로 분묘를 설치하더라도 20년이 지나면 그 분묘 소유자가 분묘가 안장되어 있는 토지를 사용할 수 있는 법적인 권리가 생긴다는 점이다. 이것은 조선시대 유행한 투장(偸葬·남의 땅에 묘지를 설치하는 것)의 관습을 법적으로 인정해 준 것이라고 추측되지만, 근대 민법의 법리에 비추어 문제 될 수 있었다. 또한, 20년이라는 기간도 문제 될 수 있었지만, 그 당시 일본 민법상 부동산 점유취득시효가 20년이라는 점을 참작하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최근 2007년 1월 대법원은 셋째 분묘기지권이 2001년 이전에 설치된 분묘에 대해서는 계속 유지된다고 선언하였다. 한편, 일제의 묘지단속규칙은 해방 이후 계속하여 1960년까지 시행되다가, 1961년 매장 및 묘지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폐지되었다. 이 매장묘지법은 2001년 장사 등에 관한 법률로 개정되면서 분묘설치 기간을 15년으로 한정하되 3회 연장하도록 하였고, 2015년에 또다시 개정되면서 분묘설치 기간이 30년으로 한정하되 1회 연장하도록 함으로써, 2001년부터 설치된 묘지는 모두 60년이 지나면 반드시 철거하여 화장하거나 봉안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공설묘지뿐 아니라 사설묘지에 대해서도 강제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 땅에 조상 묘를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60년이 지나면 묘지를 없애도록 하였다. 자기 땅은 맘대로 사용 수익 처분할 수 있는 것이 원칙인데, 유독 묘지에 관해서는 자기 토지의 사용 기간을 60년이라고 한정하는 것은 위헌이 아닐까? 고령화 사회로 접어든 지금, 60년이 지나면 조상 묘를 없애라고 하는 것은 자칫 살아생전에 부모 묘를 만들었다가 묘를 없애는 얄궂은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것인가. 국회의원들은 이런 사실을 알고나 법을 만들었는지 궁금하다. 어쨌든 2061년에는 분묘철거 소송 대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짐작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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